바로 오늘 무언가를 쓴 사람 섞일雜 끓일湯 (Others)

사람은 혼자서는 유아독존이지만, 사회 속에서는 하는 일로 흔히 정의된다. 그래서 개인이 사회적으로 표현될 때는 이름 앞뒤로 하는 일이 따라붙는다. 직함이다.


1. 전직(前職)

어떤 일을 그만두거나 다른 일을 하게 되면, 전에 가졌던 직함에는 '전직'이라는 말이 붙는다.

회사원이 퇴직하면 '전직 회사원 OOO'이 되고, 국회의원이 낙선하면 '전직 국회의원 OOO'이 되고, 경찰관이 퇴직하면 '전직 경찰관 OOO'가 된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이 생겨도 전직을 붙이지 않고, 억지로 붙이면 어색한 직업이 있다.

전직 학생, 전직 시인, 전직 주부, 전직 변호사... 이런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가만히 보면 이유가 있다.

우선 전직 학생. 학생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전직(轉職)을 해야 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그 자체가 임시직이다. 게다가 학교 교육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직 학생이다. 이런 경우 이름에 붙는 직업적 정의는 의미가 없어진다.

전직 시인. 한번 시인은 영원한 시인이다. 소설가, 화가, 만화가, 가수, 배우도 마찬가지다. 출판을 통해서든 등단을 통해서든 데뷔를 통해서든, 한번 이런 직업을 갖게 되면 평생 그런 일을 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설령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연기를 하지 않는 시기에 있다 하더라도 전직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는다. 언제든 다시 그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직업은 영원한 현직이다.

전직 주부. 이것도 대개 정년 없는 노동으로서, 전과 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직업이다. 회사원이 주부가 되면 전직 회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부가 회사원이 되어도 전직 주부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잘 쓰지 않는 데에는, 매듭이 없는 직업이라는 특성 말고도 주부라는 직업을 정식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고방식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직 변호사. 이것은 좀 특이하다. 변호사나 의사는 자격증을 따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다. 일단 자격증만 있으면, 제정신이 붙어 있는 한 평생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변호사가 되면 정년이 없는 데다가, 직업을 바꾸는 사람도 드물기 때문에 전직이라는 말이 낯설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전직 검사, 전직 판사는 많아도 전직 변호사는 찾기 어렵다. 물론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면, 예컨대 법률사무소를 닫고 차차차 콜라텍을 운영하기 시작했다거나 하면 전직 변호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전직 프로그래머는 무난한 말인가? 전직 칼럼니스트는? 전직 블로거는? 직업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2. 명실상부

명(名)은 이름이고 실(實)은 실제다. 상부는 서로 짝이 맞는다는 말이다. 겉으로 내세우는 이름과 실제의 것이 짝이 맞아야 명실상부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더라도, 전직 시인이라는 말은 없으니까 그냥 시인이다. 법률 대리인 활동을 하지 않는 변호사라도 자격증이 살아 있는 한 그냥 변호사다. 한번 자격을 가지면 영원히 명실상부가 되는 드문 경우다.

그러나 보통의 일이나 직함 대부분은 그 일을 하지 않는 순간, 이름과 실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농민이 농사를 짓지 않으면 더 이상 농민이 아니다. 군인이 싸우거나 싸울 준비를 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군인이 아니다. 회사원이 회사를 때려치우고 출근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회사원이 아니다.

그럼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는 프로그래머는? 칼럼을 쓰지 않는 칼럼니스트는? 블로깅을 하지 않는 블로거는?


3. J.A. 잰스와 필 버그

체인 커피숍 스타벅스는 2005년에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The Way I See It)'이라는 홍보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유명한 사람들이 한 말 중에서 지혜나 영감을 줄 만한 것 수백 가지를 골라서, 커피를 따라 주는 1회용 컵에 하나씩 새겼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이 말들을 눈여겨 보았고,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다. 어떤 인용문은 찬사를 받으며 널리 퍼졌고, 어떤 것은 항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이런 게 있었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할 때, 나에게 영감을 준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작가란 바로 오늘 무언가를 쓴 사람이다." 당신이 작가가 되고 싶다면 왜 망설이는가?

When I began writing, the words that inspired me were these: ‘A writer is someone who has written today.’ If you want to be a writer, what’s stopping you?

이 말은 여류 추리소설 작가 J.A. 잰스가 한 말이다. (정확한 출처는 찾을 수 없었다.)

잰스는 30여 년 동안 50권의 책을 써냈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녀가 위와 같은 말에서 영감을 받아 '바로 오늘 무언가를 쓰기' 시작할 당시, 그녀의 직업은 보험 영업사원이었다. 게다가 두 아이를 키우는 홀어머니였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애들을 학교에 보내기 전인 새벽 4~7시 뿐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보험 영업을 하기 전에는 시골 도서관 직원이었다.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는 '미국인의 얼굴'이라는 한 쪽짜리 시리즈가 실린다. 평범하거나 특이한 미국인의 모습을, 사진을 위주로 하고 짤막한 글을 붙여 보여주는 난이다. 2014년 1월치 이 난에는 뉴욕 주에 사는 필 버그라는 뚱뚱하고 촌스러운 사내의 사진이 실렸다. 그는 개 두 마리를 뒤에 싣고 오토바이에 앉아 있었다. 마치 복날 개를 사러 다니는 개장수 같은 모습이다.




옆에 붙은 글에서 그는 이렇게 자기 경험을 말한다.

이상하게 스타벅스에 가기만 하면 이 컵을 받는 거에요. '작가란 바로 오늘 무언가를 쓴 사람이다'라는 말이 적힌 컵이요. 이 컵 받은 게 3, 40번은 됐을 거에요. 어느 날, 하늘을 올려 보다가 생각했죠. 그래, 알았어. 내가 모터사이클을 타면서 겪은 온갖 재미있는 일을 책으로 쓰는 거야. 사람들이 이래요. "당신이 어떻게 책을 쓴단 말이지? 책 쓰는 것 따위는 전혀 모르잖아!" 그래서 내가 말했죠. "입 닥치고 지켜보기나 하라구!"

내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본 것은 여기까지다. 글에는 필 버그의 이름과 사는 지역, 사진을 찍은 사람 이름만 나왔을 뿐이다.

나중에 나는 필 버그라는 사람이 실제로 책을 펴냈나 한번 찾아보았다. 아마존에는 2011년에 출간된 <신나는 라이드(What a Ride)>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저자는 필 버그였다. 이 책은 그의 두 번째 책이었다. 첫 번째는 애견 움마를 뒤에 태우고 전국을 다니면서 겪은 일을 쓴 <움마와의 여행(Travels with Umma)>이었다.

나중에 나는 그가 임업 노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진가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사진)


물론 나는 그가 쓴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책이 재미있는지, 잘 씌었는지, 그로부터 배울 바가 많은지는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오늘 쓰겠다'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것, 그리고 개장수 같은 사내의 뚝심과 영감(靈感)의 연쇄 반응이 합쳐져 이러한 일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4. 나는 쓴다

나는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뭔가를 쓴다는 점은 확실하다. 멍멍 개소리든 짹짹 새소리든 여하튼 쓴다.

나는 오늘도 쓴다. 나는 블로거다. 전직 블로거도 아니고 휴직 블로거도 아닌, 바로 오늘 뭔가를 쓰는 블로거다.

책의 초고든 논문이든 레포트든 블로그든 일기든 소설이나 시 습작이든, 오늘도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쓴 모든 사람에게 뜨거운 동료애를 전한다. 우리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인류 문명의 요체, 문자로 맺어진 동지요 도반이다.



Advertisement


 

덧글

  • 우유차 2015/03/13 18:29 # 답글

    ;_; 멍멍. 열심히 애/ 쓰겠습니다.
  • deulpul 2015/03/13 19:16 #

    언제나 한결같으신 우유차님 화이링입니다!
  • camino 2015/03/13 21:28 # 삭제 답글

    아, 읽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입니다. (버리다시피 한 블로그 때문은 아닙니다.) 또 바로 이런 이유로, 들풀님께 늘 감복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니 안심입니다만, 그래도 언제까지든 '前職'이 되지 마시기를.
  • deulpul 2015/03/14 15:28 #

    아마도 저 미욱하면서도 꿋꿋한 인간들 때문에 그러신 것이겠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절한 말씀 고맙습니다.
  • 미스티 2015/03/13 23:05 # 삭제 답글

    죽기전에 꼭 해보고 싶은것 중 하나가 책을 내보는 것인데, 들풀님의 이번글이 정말 저에게 해주는 말씀같네요.
  • deulpul 2015/03/14 15:34 #

    네, 당장 시작합시다! '시작이 반이다'는 속담은 우악스러운 과장인 것 같은데, 시작 안 하고 열심히 모색만 하면 결국 안 된다는 점에서 보면 진리인 것 같기도 합니다.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꼭 기억해야 할 문구라고 생각합니다.
  • 구름거북이 2015/03/14 04:28 # 삭제 답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몇분의 role model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분이 deulpul님입니다.
    누군가 작가에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것이 영감이 되어 J.A.잰스를 작가로 만들었고, 그녀의 아포리즘이 필 버그의 오늘을 만들었습니다. deulpul님의 블로그는 또 저에게 영감이 되네요. 오늘도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deulpul 2015/03/14 15:42 #

    자칫 갈피를 잡기 어려울 수도 있는 계통 흐름을 간명하게 정확히 짚어 주셨네요. 잰스가 스스로에 대해 쓴 부분(본문 링크)을 보면, 처음 책을 쓰면서 생활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글쓰기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것(creative writing 수업을 듣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마도) 그래서 원래는 논픽션을 썼으나 편집자가 픽션 작가로 이끌었다는 것 같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글쓰기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고 책도 많이 나와 있으니 퍽 다행입니다. 블로그도 아주 좋은 수련 공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수련 공간이자 바로 그 성과물이기도 하겠지요. 친절한 말씀 고맙습니다.
  • 2015/03/16 14:58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5/03/16 16:14 #

    아주 잘 했어! 바로 RSS 등록한다. 아니 뭐, 내 리더에 등록된 분중에는 6개월에 하나씩 쓰는 분도 있으니까 부담은 갖지 마시구- 하하.

    맨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사진까지 다 기억이 나. 그만큼 과작이었다는 이야기겠지? 옛날 쓴 것을 보면 언제나 놀랍지. 망각 잘하는 모든 나르시시스트들(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의 금언 "신이시여, 제가 정말 이런 글을 썼단 말입니까!"를 떠올리면, 시간 지나면서 사람이 쇠하는 것처럼 글이나 의지나 관심도 일정한 정도로 쇠퇴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당장 해야 한다는 당위가 더 생긴다고. 억지라도 할 수 없어. '당신이 마주한 오늘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가 아니라, '당신이 마주한 오늘 쓰는 글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젊은 글이다'랄까. 영화도 궁금하네. 조만간 꼭 볼께. 추천(이라고 단정) 감사!
  • 김재호 2016/11/28 10:49 # 삭제 답글

    너무 멋진 다짐을 응원합니다.(저도 자극받고 갑니다)
    들풀넷의 한 꼭지에 출연(?) 한 것도 기쁩니다! 하하.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