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이 히틀러로부터 받은 월계수? 섞일雜 끓일湯 (Others)

앞에 쓴 '히틀러가 손기정 목에 금메달을 걸어줬다?'에 덧붙임으로 붙였다가 너무 길어져서 따로 빼 왔다.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의 주장이지만, 당시 손기정과 함께 뛴 남승룡 선수에 대한 왜곡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좀 자세히 썼다.

인터넷을 보면 당시 3위를 한 남승룡이 '손기정이 1등을 한 것보다 히틀러로부터 받은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어서 그게 더 부러웠다'고 말했다는 식의 글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또 남승룡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히틀러로부터 월계수를 받아와서' 서울 만리동 손기정 체육공원에 심었다는 글이나 문서도 흔하다.

손기정기념관의 웹페이지조차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밑줄은 내가).




이런 말들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앞 글에 적은 것과 같은 이유로 손기정은 히틀러로부터 월계수를 받은 적이 없다.

남승룡도 저렇게 말한 적이 없을 것이다. 남승룡의 말을 인용한 글들을 보면, 위처럼 히틀러가 등장하는 것이 있고 등장하지 않는 것이 있다.

손기정이 1등을 한 것보다 (히틀러로부터 받은? / 히틀러가 준?)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어서 부러웠다.

양으로는 히틀러가 빠진 것이 더 많다. 이런 점, 또 현장 상황이나 인용 형태로 볼 때 히틀러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남승룡의 원래 발언이고, 거기 히틀러를 첨가한 것은 그의 말의 어감을 강화하려고 한 후대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히틀러가 들어간 것이든 빠진 것이든, 이런 글들은 남승룡의 발언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출처를 밝힌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이 직접 들은 것처럼 따옴표까지 쳐 가며 써놨다. 이런 글을 서로서로 긁어가며 인용한다. 그러니 맨 처음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남승룡의 발언에 히틀러를 첨가한 것은 원문을 왜곡한다는 점에 더하여 또다른 문제를 낳는다. 남승룡을 크게 욕보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일본 국기를 가릴 수 있도록 나치 독재자로부터 월계수를 받은 것이 부러웠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로부터 월계수를 받았다'는 말이 나치 치하 올림픽에서 우승했다는 점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말이라고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문제는 여전하다. 올림픽 시상과 직접 관련 없는 개최국(개최 도시가 속한 나라) 국가 원수를 올림픽의 주체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 우승자는 개최국 국가 원수가 아니라 올림픽위원회로부터 상을 받는다. 올림픽을 조직하고 진행하는 주체는 올림픽위원회와 개최 도시다. 국가 원수는 개막 행사 때 IOC 위원장의 소개에 따라 개회 선언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위와 같은 진술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거나 일부러 무시한 억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금메달을 받은 선수들을 놓고 노태우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고 하거나,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푸틴이 김연아에게 은메달을 주었다고 하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 남승룡 선생이 한 발언의 정확한 원 출처를 아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Advertisement




[덧붙임] (2015년 3월17일 22:00)

'히틀러가 손기정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었다'든가 '히틀러로부터 받은 월계수' 같은 말의 허무맹랑함은 손기정과 남승룡이 마라톤에서 1위와 3위를 한 뒤 벌어진 시상식 모습으로 간단하게 입증된다.

1956년 8월9일 <동아일보>의 기사 '백림(伯林, 베를린) 마라톤 제패 오늘 20주년'이라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강조는 내가).


때는 흘러 20성상. 일제의 탄압 앞에 혹독한 고문을 받아가면서 끝내 백절불굴 대일 항쟁의 필봉을 추호도 굽히지 않고 견지해 온 본보는 오늘 역시 건재하고, 그때 양정고보에 재학중이던 홍안의 소년 손기정 선수는 지금 실업계에 활약하고 있으며, 손 선수가 우승의 표창대에서 백의의 처녀로부터 수여받은 감람수는 지금 손 선수의 모교 양정에 무성하다.


손기정이 나무를 히틀러가 아니라 '백의의 처녀'로부터 받았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백의의 처녀가 누구인가? 올림픽위원회를 대표하여 시상 진행을 한 여성 관계자일 것이다.



위 사진은 1936년 당시 <조선중앙일보>가 올림픽 소식을 전하면서 일장기를 지우고 실었다가 곤욕을 치른 사진의 원본이다. '백의의 처녀'가 영국 선수(2위)의 머리에 월계관을 씌워주는 중이다. 손기정에게는 이미 월계관과 나무를 주었고, 남기룡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최인진이 쓴 <손기정 남승룡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다>에 실린 것, 아래 논문에서 재인용.)

레니 리펜슈탈이 만든 베를린 올림픽 영화 <민족의 제전(Olympia I)>에는 마라톤 관련 부분이 10여 분 들어 있는데, 시상식 장면이 어땠는지는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1:51:50부터).






영상에서 보다시피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손기정에게 나무 화분을 수여하는 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이 처녀인지 아줌마인지다. 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저 백의의 처녀는 어느 새 히틀러로 둔갑했다.


--- ** --- ** ---


남승룡 선수의 동생 남기룡도 형에 못지 않는 발군의 마라톤 선수였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한 한인 신문에는 '조선의 마라토너 남승룡과 남기룡'이라는 시리즈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다음은 그 중 일부다.


동양대학에서 마라톤을 하게된 남기룡은 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3위를 입상한 이후 새로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남기룡이 동양대학교 재학시절 전일본 관동선수권대회에서 1위를하고 미.일 친선 마라톤선수권대회 3위, 동경마라톤선수권대회등을 제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인으로서 새로운 일본국가대표선수가 되었고 일본인들을 놀라게했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남기룡의 손자로 미국에 살고 있는 남희성 기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남기룡과 큰할아버지 남승룡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이 기사는 여러 자료와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쓰여졌다.

그에게 연락하여, 생전에 남승룡 선생이 "손기정이 1등을 한 것보다 (히틀러로부터 받은)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어서 부러웠다"라고 한 적이 있거나 그런 언급이 있는 자료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남기자는 어린 시절부터 큰할아버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나, 히틀러가 언급되는 이야기는 접해본 기억이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남승룡에 관하여 쓴 박사논문을 참고해 볼 것을 추천했다.

이 논문은 이상우가 2010년에 중앙대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마라토너 남승룡의 생애와 체육활동에 관한 연구'다. 손기정에 비해 덜 알려진 남승룡에 관한 많은 자료와 증언을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한 논문이다.

이 논문을 꼼꼼히 훑어보았으나, 위의 진술과 관계 있는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