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해녀 99명 섞일雜 끓일湯 (Others)

당신의 바뀐 행복관, 대물림하진 않나요

교육 관련 칼럼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좌파나 진보가 자녀 교육에서는 보수적 가치관을 차용해 이중적 기준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으며, 이는 보통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쟁 속에서 과거의 행복관을 잊었기 때문으로, 부모들이 과거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문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좀더 폭넓은 생각을 해보고 싶다.

글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밑줄과 기호는 내가 붙였다.




교육 현실을 비판하는 칼럼을 입시 문제 식으로 봐서 좀 안됐지만, 여하튼 다음과 같이 따져 보자.

문제: 위 필자가 B)에서 말한 내용에 잘 어울리는 것은?
1) ①
2) ②
3) ③
4) ①, ②, ③ 모두

그렇다. 내가 보기에 필자는 자신을 스스로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①~③은 B)와 어감에서, 또 인구 구성에서 정도의 차이가 좀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모두 '과거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존중하고 남과 나누는 데서 행복을 찾았다'라는 말이라는 점에서 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③의 특징은 공동체주의적이고 이타적인 것이 아닌가? 이타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공동체주의적 측면을 지닌다고는 할 수 있을 듯싶다. 상투적이고 타성적인 비판은 흔히 구체적인 내용과 괴리되게 마련이다.

댁, 난독증이요? 네, 뭐 그런지도요.


--- ** --- ** ---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파란 줄로 표시한 A)와 C)다.

저 해녀 할머니는 작업 효율이 좋은 장비를 쓰면 다른 대다수 사람에게 돌아갈 수확이 없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적절히 조절한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전에도 들어본 것 같다. 거기서는 아마 미국 원주민이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내가 다 따가면 남들은 어쩌냐 하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해녀 할머니의 이야기를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할머니의 이야기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추출할 수 있다.


1. 공동체 의식

할머니는 왜 나머지 99명이 빈손으로 돌아갈 것을 걱정하였는가? 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면서 다른 사람의 욕구를 고려에 넣는가?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할머니가 보편적인 박애주의자가 아니라면, 나는 그녀가 자신과 나머지 99명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을 '해녀 공동체'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보기에 다른 해녀들은, 생판 모르고 나와는 어떤 상관도 없는 남이 아니다. 같은 물에서 같은 일을 하며 같이 벌어먹고 사는 동료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처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은 경쟁에만 매달리면서 모두의 삶이 피폐해 가는 일을 막는 데에 공동체의 실체적 형성이나 관념적 설정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자신이 속해 있다고 인식하고 그 구성원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동체의 범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단 한 명(즉 자신)만을 그러한 존재로 설정할 수 있고(이 경우에는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되겠지), 또 어떤 사람은 전 인류, 더 나아가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물을 포함하는 공동체를 염두에 둘 수도 있다. 인터내셔널리즘도 그런 사례가 되겠고, 아프리카 기아 아동에게 구호 기금을 보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저 양방향 화살표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가 되겠다. 각 개인의 정체성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또 위 칼럼에서 필자가 말한 것처럼 경쟁의 정도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경쟁의 요소에는 자원이나 땅의 공급 정도, 사람의 수 같은 것이 모두 변수가 될 것이다. 또 퍼트넘이 지적했듯 개인을 갈수록 고립시키는 대중 매체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여러 요소들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어떻게 하면 개인들이 좀더 큰 범위의 공동체를 자신의 정체성의 틀로 간주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2. 억지 이론 (deterrence theory)

해녀 할머니가 대량 수확을 가능케 하는 스쿠버 장비를 장착하고 물질에 나섰다고 해 보자. 그럼 1명이 100명 분의 일을 할 수 있고, 한정된 물 속 자원은 극히 편중되는 형태로 배분된다.

거꾸로, 할머니가 아니라 나머지 99명 중 누군가가 이런 일을 벌이면, 할머니는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에 포함된다. 말하자면, 내가 하면 남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은, 남이 하면 내가 피해를 본다는 생각과 내용상 동일하다. 이러한 긴장이 억지력을 만들어 내고 있을 수도 있다.

한 해녀가 스쿠버 장비를 갖추고 싹쓸이를 하러 나서면 나머지 99명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빚을 내고 집을 잡히고 땅을 팔아 스쿠버 장비를 마련하고 물에 들어올 것이다. 이 경우 다른 모든 조건이 비슷하다고 가정하고 산술적으로 보자면, 상황은 결국 원래 양상으로 되돌아간다. 현대식 스쿠버 장비를 장착한 해녀 100명은 스쿠버 장비 없이 작업을 할 때와 똑같이 1/100씩을 수확하게 된다.

이렇게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동안, 스쿠버 장비 100개에 무의미한 재원이 낭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스쿠버 장비를 사러 나서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합리성을 공동체적 합리성, 혹은 손실에 근거한 합리성이라고 해 보자.


3. 제도적 규제

그러나 현실에서는 늘 먼저 장비를 사러 나서는 사람이 등장한다. 비록 한시적이라도 선취 효과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다른 합리성인데, 이를 이기주의적 합리성, 혹은 이득에 근거한 합리성이라고 해 보자. 게다가 이러한 시도는 흔히 리노베이션이라는 말로 칭송된다. 자원의 무한한 확장을 기대하는 인간의 바람과는 달리, 현실은 대부분 제로-섬 상황이다. 많이 거둬가는 사람이 있으면, 못 가져가는 사람이 생긴다.

해녀들 중에서 먼저 스쿠버 장비를 쓰기 시작했거나 혹은 남보다 더 좋은 장비를 쓰는 해녀들이 지속적으로 더 많은 수확을 하는 상태라고 해 보자. 게다가 이들은 다른 해녀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마저 걷어찬다. 그럼 상황은 1/100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며, 다른 해녀들은 물질을 접고 딴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녀 공동체는 해체되고, 물 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은 점점 독점화된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시장경제의 양상이다.

마침 뜻있는 제주도지사가 있어, 해녀들이 모두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지론을 가졌다고 해 보자. 그는 해녀 100명이 그 수확과 살림에 정도 차이는 있을 수 있을지언정 어느 누구도 폭삭 망하고 거리에 나앉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일을 야기할 수 있는 해산물 채취 방법에 일정한 규제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1시간 이상 쓸 수 있는 스쿠버 장비를 착용해서는 안 된다든가, 한 사람이 하루에 채취할 수 있는 양은 20kg 이하로 한다든가.

세상에 순수한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시장경제를 구두선처럼 입에 달고 사는 시장 근본주의자들도 순수 시장경제 체제에 내던져지면, 그중 일정한 비율은 등비수열의 양상으로 계속 쪽박을 차게 될 것이다. 그게 시장경제의 논리고 생리다. 그렇게 축생처럼 살 순 없고 사회 구성원 모두 살아야 하니까,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더라도 거기에 일정한 제한과 규제를 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단위가 시장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국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사악하거나 멍청한 어떤 인간이 제주도지사로 당선된다면, 이러한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다. 소수의 해녀를 제외한 대다수 해녀의 삶은 피폐해지게 된다.

남들 다 아는 이야기 떠들었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이 것이다: 인터뷰에 나온 해녀 할머니의 99명 배려론은 1) 그러한 생각을 가능케 하는 공동체 의식에 더하여 2) 해녀 모두의 (공동체적) 합리에 대한 각성과 3) 적절한 제도적 규제로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 쉽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 ** --- ** ---


나는 위 칼럼의 필자가 '인텔리들의 관념'이라고 말한 것의 내용을 필자 자신에게로 되돌렸다. 그래서 그가 옳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의 회복, 공공 영역에 대한 관심의 회복, 공동체 의식의 회복과 확장, 필자가 한 말로 하자면 과거의 행복관 회복 같은 것은 사람이 남과 더불어 사람답게 사는 데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회복'이란 과거의 것에 일정한 가치를 두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텔리들의 관념이든 노동자들의 관념이든,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사람들이 선하면 좋은데, 선한 사람의 선함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인간이 반드시 등장한다. 근대 경제학의 대전제처럼, 인간은 (이익 추구를 위한) 합리성이 도덕성에 앞서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그런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남을 배려하고 남과 더불어 사는 일이 행복하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남을 이기는 일, 남들이 못 가지는 돈과 권력을 갖고 이를 행사함으로써 만족감을 얻는 일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사회의 일부만이, 이를테면 진보주의자들이 전자처럼 살아야 한다면, 그들과 그 자식들은 남을 이기는 일을 행복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져주고 뜯기기만 하면서, 그런 일을 행복이라고 자위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한 쪽(보수)이 경쟁 마인드를 가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다른 쪽(진보)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 이런 결과가 벌어진다.

그렇다면 함께 뜯으러 나서야 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 전개된다. 해녀 100명이 모두 스쿠버 장비를 갖추고 무한 경쟁에 돌입하면서 삶이 피폐해지거나 일부가 밀려나는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현실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혹은 대처할 의지가 있기나 한가에 따라 한 사회의 특성이 결정될 것이다. 다만 국가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막기 위한 사회적 합의의 결과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예컨대 교회 공동체를 지탱시키는 것이 신실한 종교적 귀속감과 더불어 십일조나 사역 같은 실질적 공헌 제도라는 점 같은 것을 기억할 수 있을 듯싶다.



Advertisement


 

덧글

  • 수시렁이 2015/03/22 01:36 # 답글

    동의의 박수를 보냅니다!
  • deulpul 2015/03/22 10:07 #

    고맙습니다. 아마 제겐 오랫동안 계속 생각하여야 할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독자1 2015/04/05 21:27 # 삭제 답글

    B를 다시보니 정말 읭? 하게되네요. 글에 일관된 흐름과 짜임새를 갖는다는건 어려운 일인가봅니다. 구독해서 늘 조용히 읽던 독자인데 개인적인 질문을 두가지 드리고 싶어요. 하나는 글을 읽을 때 항상 저절로 이렇게 예리하게 읽게되시는가... 하는 거고요ㅎㅎ 다른 하나는 위의 <1. 공동체 의식> 에 관한것이에요. 최근에 읽은 책 심리정치에서는 신자유주의사회에 대해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특징으로 지적하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고, 사건이나 정책에 대해 사후 불평불만정도만 나올 뿐이라고요. 돌이켜보니 제게도 공동체의식이랄만한게 전혀 없어서 공감도 반성도 많이 했는데, 이 공동체의식이라는 것이 정말 해체되었다고 본다면 어떻게 다시 만들 수 있을까요? 개인의 정체성, 경쟁의 정도, 매체의 역할을 언급하셨는데 혹시 더 자세히 생각하신 바가 있는지 여쭈어봅니다.
  • deulpul 2015/04/06 13:29 #

    제가 답글로 말씀드리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공동체 성격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고찰은 독일 사회학자 퇴니에스의 게마인샤프트/게젤샤프트까지, 혹은 더 위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근현대 사회의 항상적인 문제이지요. 오래된 문제라 다양한 진단과 처방이 나왔고, 저 역시 위에서 드린 말씀처럼 그 이론과 실천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 할 문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언젠가 쓸만한 답을 드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YMCA'부터 들으면서... http://www.youtube.com/watch?v=CS9OO0S5w2k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