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금메달 증발 사건 섞일雜 끓일湯 (Others)

박근령은 박근혜의 동생이다. 박근혜의 뒤를 이어 1990년대에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으며, 지금은 바이오운동본부라는 곳의 총재를 하고 있다.

지난 3월15일 나온 한 보도에 따르면, 박근령은 최근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법원에 소송을 냈다고 한다. 소송의 상대는 육영재단, 소송 이름은 '이사회결의 부존재 확인청구 소송'이다. 해석하자면 '육영재단의 이사회 결의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이다.

이게 무슨 소송인지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과정을 먼저 간단히 요약하면,

1. 박근혜와 박근령, 알력 끝에 박근령이 육영재단 이사장 계승
2. 부실 운영과 비리로 이사장 선임 취소당함
3. 법정 싸움 도중 다시 취임
4. 대법원 판결로 이사장직에서 밀려남

이상의 과정에서 박근령은 1, 3으로 두 차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박근령 측은 두 번째 취임이 이사회의 의결 없이 법원의 결정으로 그렇게 된 것이므로 정식 취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두 번을 넘는 연임을 금지한 규정에 해당되지 않아 다시 이사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 쓴 것은 왜 이런 소송이 나오게 됐는지, 박근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을 하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도된 기사와 자료에 바탕하여 간략히 서술한 것이다. 손기정 금메달 증발 사건으로 건너뛰고 싶은 분은 여기를 누르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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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재단은 육영수가 아동복지 사업을 목적으로 하여 1969년에 설립한 재단이다. 재단법인이니까 돈이 주체다. 설립 때 육영수가 1천만원을 냈고, 그러자마자 여기저기서 기부금, 찬조금, 보조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고 한다. 재단 설립 열흘 만에 재산은 1천만원에서 2억6천만원 이상으로 늘었다. 물론 기부금을 낸 사람들이 아동 복지 사업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2005년에 한 국회의원의 국정감사 자료를 토대로 하여 작성된 자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육영재단은) 1969년 4월 14일 육영수여사가 1천만원의 출연금을 기본재산과 청소년의 승공사상 고취앙양를 목표로 설립되었으며, 정관 제6조 (수입)에서 ‘이 법인의 경비는 수익금, 찬조금 및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으로서 충당한다’(1980년도 개정)고 명시했듯이, 설립 열흘만인 1969년 4월 24일 재산변동을 보면 기부금찬조금 2억3백6십4만3천원, 정부보조금 1천만원, 지방자치단체 4천만원, 출연금 1천원[sic]을 합쳐 설립후 열흘만에 26배나 늘어난 2억6천3백6십4만3천원으로 늘어났다.

1973년 9월 27일 대한교육보험으로부터 성북동의 토지 1,000평을 기증받았고, 74년 10월 1일 서울시로부터 능동부지 3만평의 사용허가를 받아 1975년 12월 29일 서울시와 교환을 통해 매입하였고, 1981년 1월 22일에는 서울시로부터 2억원의 운영비를 지원 받았고, 1983년 8월 27일 서울시는 화장실을 지어 무상기증하는 등 설립자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등 권력의 남용을 통한 재단 재산 형성과정을 알 수 있다.


육영재단과 어린이회관이 함께 쓰는 홈페이지에 명시된 육영재단의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아주 소중하고 존경할 만한 일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동안 이 재단이 세간에 알려져 온 것은 이런 활동 때문이 아니라 박정희-육영수의 세 자녀 사이에 벌어진 다툼 때문이었다.

이 재단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등 신군부가 정권을 잡는 동안 표류하다가, 1983년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박근혜는 이후 1990년까지 재단을 운영했다.

1987년께부터 재단과 어린이회관 직원들이 박근혜 이사장측에 집단 항의하는 일이 잦아졌고 농성까지 벌이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전횡을 일삼는 어용 간부를 퇴진시키고 족벌 인사를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 '어용 간부'란 박근혜에게 늘 붙어다니는 그림자 최태민을 말한다. 그가 육영재단에서 벌인 일은 한 기사에 잘 드러나 있다.

1990년이 되자 갈등은 노골화되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박근령까지 얽혔다. 박근혜와 최태민에 대한 안팎의 비난이 거세지자 박근혜는 이사장 자리를 내놓았고, 이 자리는 박근령이 차지한다. 당시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90년 차녀 박근령씨와 운영권 다툼을 벌였다. 박근령씨는 박 위원장의 측근인 최태민 목사가 육영재단 이사로서 전횡을 저질렀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박 위원장은 이사장직을 내놓았고 박근령씨가 새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시사IN>


박 후보와 근령씨 간에는 90년대부터 문제가 생겼다. 1990년 근령씨를 지지하는 '숭모회'는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운동을 벌였으며 결국 박 후보가 1992년 이사장직을 근령씨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지만씨도 근령씨 편에 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재단 내부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시점은 1990년 말이다. 이사장이던 박근혜 전 대표는 방만 경영 등을 이유로 측근 인사의 사퇴를 요구하는 재단 안팎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측근 최 모씨와 함께 2선으로 물러났다. 1990년 12월 박 전 대표는 이사장 직을 동생 근령씨에게 넘기고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옮겨갔다.

당시 최씨의 전횡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던 관계자는 “우리는 재단을 방만하게 운영하고 전횡을 휘두른 최씨의 사퇴를 촉구했었다. 그런데 이사장이던 박근혜씨가 책임지고 물러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했다. 박 전 대표의 측근으로 알려진 최씨는 지난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 전 대표의 ‘아킬레스건’으로 거론된 인물이다. <주간조선>


고 박정희 대통령의 장녀 근혜씨(39)의 육영재단 이사장직 사임을 놓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하다.

고 육영수 여사의 유업재단법인 육영재단의 운영권을 둘러싸고 동생인 근영씨(35)와 갈등을 빚은 끝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소문이 계속 번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 박 대통령의 11주기 직후인 지난달 28일 근영씨를 새 이사장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숭모회' 회원들이 서울 성동구 능동 어린이회관으로 몰려가 근혜씨의 퇴진을 요구한데 이어 지난 6일에는 근혜씨가 단장으로 있는 근화봉사단원들이 근영씨의 취임을 반대하는 농성을 벌임으로써 두 사람의 '갈등설'은 점차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동아일보>


이렇게 하여 박근령은 육영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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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이사장을 하던 박근령은 2001년에 철퇴를 맞는다. 성동교육청이 부실 운영과 비리를 근거로 이사장 승인을 취소하는 처분을 내린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위에서 인용한 2005년 자료에 나온 다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밑줄은 내가):


1992년 4월 15일 개최된 이사회 회의록의 기부금 승인의 건에 대한 보고를 보면 “박정희사상 서설”이라는 저서를 출판한 민족중흥사상연구소(소장 정재경)에 매월 150만원을 연구활동비로, 박정희 대통령의 문경국교 교편생활때 하숙했던 청운각(문경소재)의 보수비로 매월 300만원씩 지원할 것을 의결하여 공익법인의 활동이라 보기에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으며, 1994년 육영재단은 정관변경을 통해 “설립자의 투철한 국가관 및 충효사상을 고취, 설립자의 유적을 보존 연구하여 투철한 국가관과 건전한 민족사상에 대한 연구, 설립자의 유적을 보존 연구하여 투철한 국가관 및 충효사상을 고취”한다는 목적사업 신설의 내용으로 유신 박정희의 유신이데올로기 고착 및 재생산을 도모하나 당시 서울시동부교육청은 정관상의 목적사업과 부합되지 않는다며 보완을 요구하였다.

최근 육영재단의 위법, 부당 운영사례를 살펴보면, 지병문의원의 보도자료에서 밝힌 바와 같이 2001년 1월 27일 성동교육청의 실태조사 결과 시정지시 사항이 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행되지 않은 사례가 있으며, 1994년 10월 1일부터 현재까지 주무관청 승인없이 기본재산을 예식장으로 불법 임대와 확장을 통한 추가 임대와 관련 임대보증금 납부금 중 1억을 박근영 이사장이 횡령하였다.

또한, 2001년 12월 3일 성동교육청의 불법운영사례 적발과 실태조사 거부로 박근영이사장에 대한 이사취임승인취소 이후 행정소송을 통해 성동교육청의 지도감독권을 확인하였음에도 현재까지 총 7회에 걸쳐 실태조사를 거부하고 있다.

이 외에도 유치원 운영에 있어 미 인가된 무허가 시설을 유치원 교실로 운영하였고, 국토순례단 부실운영으로 인한 성희롱 및 아동학대 시건, 과기부의 과학기술진흥기금 지원과 관련한 비리 의혹, 박근영 이사의 취임 이후 부당 운영 등으로 인한 고소∙고발 건이 100여건에 이르며 그로 인한 변호사 수임료 과다 지출, 어린이회관내 지하식당 가건물 불법 증측에 따른 이행 강제금 1억1,320만원 징수(광진구청), 감독기관의 시정지시 및 사법기관 고발로 인해 98년 5월이후 최근 2월까지 벌금형 3회(800만원), 선고유예 1회, 대법원 계류 2건 등으로 인해 2004년 말 결산서상 약 157억의 부채 발생 등의 공익 재단 운영이라고 보기 힘든 비도덕적이고, 범죄에 해당하는 사례들이 부지기수다.

결국, 서울시교육청은 2005년 4일 육영재단의 박근령(51) 이사장과 김종우(53) 법인실장 등 2명을 '공익법인의 설립 운영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동부지검에 고발했다. 이와 함께 서울시교육청은 육영재단 측에서 조만간 이사회를 열어 법인 운영상황을 면밀히 조사하고 관련자를 문책하지 않을 경우 내년 1~2월쯤 법인 설립허가를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비록 끈 떨어진 존재이긴 하나 한때 최고 권력을 손아귀에 쥔 사람의 자녀들, 지금도 비호 세력이 경향 각처에 즐비한 사람들이 관계하는 재단임에도 이사장 취소, 법인 설립허가 취소 같은 극단적 조처들이 내려지거나 거론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상황이었는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박근령은 성동교육청의 이사장 취소 처분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사장 직을 물러나지는 않았다. 대신 법원에 '이사장 승인취소 무효확인' 소송을 냈다. 재판이 대법원까지 가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 버틴 셈이다. 그 중간인 2004년에 재취임을 하는데, 이런 내용으로 보아 2001년~2004년 사이에 서류상으로 이사장 직을 잃었던 시기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계속 직을 수행하고 있어온 때문인 듯, 이 과정을 제대로 언급한 자료는 없다.

2004년에 재취임한 박근령은 2008년에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받을 때까지 이사장 직을 계속했다. 이 기간 중인 2007년에 신동욱과 결혼하여 재단 안팎에서 큰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몸싸움을 하고 서로 출근을 가로막고 맞고소하는 상황이 재연된다. 박근령은 동생 박지만이 이러한 사태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008년 대법원은 최종 판결을 내고 박근령의 소송을 기각했다. 이에 따라 박근령은 즉시 이사장직을 상실했다. 한 기사는 대법원 판결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판결문에서 “박 이사장은 재단을 운영하며 미승인 임대수익 사업을 하고 여비를 부적절하게 지출하는 등 공인법인법과 육영재단 정관을 위반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성동교육청의 시정 요구가 있었음에도 이행하지 않은 점에서 이사장 승인 취소 사유에 해당한다고 본 원심 판결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지금 박근령이 다시 이사장 직을 차지하기 위해 소송을 내는 것은, 2004~08년 재임한 것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이사장이 되려면 이사회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 또 이사장은 3회 이상 연임할 수 없도록 한다고 한다. (맨 위의 기사에서는 법 규정이라고 하였으나, 이나 시행령에는 그런 규정이 없다. 재단 정관상 규정인 듯.) 1990년 박근혜에 이은 취임, 2004년 재취임 등 두 번의 취임을 거쳐 이사장으로 재임한 박근령은 다시 이사장이 될 수 없지만, 2004년의 두 번째 취임은 이사회 의결이 없는 상태에서 법원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므로 연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사회결의 부존재 확인청구 소송'을 내는 것은 그런 의미다.

법원은 이 소송에 대한 판단을 이미 내린 바 있다. 해당 소송 제1심에서 법원은 박근령의 제소를 각하했다. 이사회 결의가 없었다는 것을 박근령과 육영재단이 모두 인정하므로, 법률적 판단을 구하여야 할 소송거리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불복하여 이번에 다시 소송을 낸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사회 결의가 있었나 없었나가 아니라, 박근령이 다시 이사장이 되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로 회귀된다. 이사회 결의가 없었다고 강변하면 2004년 이후 자신이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는 말이 된다는 점은 제쳐놓고라도, 왜 이사장직 취소와 재취임 사태가 벌어졌는지를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다시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설 면목이 있는지, 그것이 먼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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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이 길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은 1979년에 금메달과 월계관을 비롯해 50년 넘게 수집해 온 기념물을 몽땅 육영재단(어린이회관)에 기증했다. 다음은 1979년 7월26일에 나온 한 기사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패자인 손기정 씨가 올림픽에 관한 소장품 일체를 어린이회관에 기증, 일반에 공개했다.

당시의 올림픽 수상 금메달과 월계관을 비롯한 1천5백여 점의 올림픽 관계 자료가 한 자리에 전시된 것. 25일 오후 개장된 서울시 성동구 능동 산3의 39 어린이회관 문화관 1층에 마련된 17평 넓이의 '손기정 선생 기증 올림픽 기념품 전시장'.

이 자료들은 손기정 씨가 지난 50여 년 동안 베를린 올림픽 등 각종 국제 경기에 참가, 수집한 각종 메달 기념우표 주화 포스터 사진 등이며 함북도민 일동과 윤치호 씨등이 보낸 축전도 있어 이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고 싶어 추억이 서린 자료들을 기증했다"는 손기정 씨는 "이밖에도 역사에 남을 만한 자료들이 많이 사장되어 있을 것"이라며 소장자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손기정이 평생 수집하여 애지중지 간직하고 있던 물품들은 10여 년 동안 어린이회관의 17평 기념관 전시장에서 전시되었다.

그러나 육영재단은 박근령이 이사장 때인 1993년에 돈이 없다며 손기정 기념관의 문을 닫았다. 그 뒤 한 번도 문을 열지 않았다. 다시 열겠다고 말은 여러 차례 했지만, 역시 돈이 없다며 열지 않았다.

기념관이 휴관하는 동안 금메달과 월계관을 비롯한 기념품들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언론에게도, 손기정의 가족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손기정 자신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2008년 10월에 한 기사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육영재단이 각종 소송에 연루되고 노사분규가 일어나는 등의 문제로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일반전시를 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손기정 금메달이 있었던 전시관은 문을 닫았다. 이 후 금메달을 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금메달의 주인인 손기정 선수도 죽기 전까지 금메달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무총장(손기정의 외손자 이준승)은 “할아버지와 함께 2~3차례 육영재단에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문이 닫혀있어 금메달을 볼 수 없었다”며 “마지막으로 육영재단에 갔을 때는 할아버지의 몸이 많이 쇠약해지셔서 휠체어를 타고 갔는데 메달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고 당시의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손기정 선수는 끝내 금메달을 보지 못하고 지난 2002년 타계했다. 영정 앞에라도 금메달을 모시고 싶었던 아들의 바람도 이뤄지지 않았다.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손기정 선수의 아들 손정인씨는 “아버지가 작고했을 때 월계관과 금메달을 영정 앞에 모시고 싶었지만 재단 측이 분실 우려로 거절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육영재단이 휠체어를 타고 폐관된 전시관을 찾아온 손기정에게 금메달을 보여주고 싶었더라도, 또 손기정 타계 때 금메달을 영정 앞에 내놓고 싶었더라도 그럴 수 없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금메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2005년에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링크가 죽어서 캡쳐본으로 대체):


어린이회관 전시품을 총괄하는 서동진 관장(육영재단 사무국장 겸임)은 8∼9일 이틀간 본보 취재팀이 5차례나 반복해 금메달 보관 여부를 문의할 동안 일관되게 “금메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재단 공식입장” “기증품 목록에 없고,아는 직원도 없다”고 답변했다. 재단의 다른 간부와 직원들도 “금메달 얘기는 금시초문”이라 했고, 지난해 6월 손(기정)옹 유품을 취재했던 모 잡지사 사진기자는 “당시 금메달을 촬영하려 했는데 재단에서 ‘금메달은 없다’고 해 찍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다른 방송 기사에는 이런 문답도 나온다:

직원: 월계관은 있습니다. 이사장님실에.
기자: 금메달은요?
직원: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본 건 월계관만 봐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손기정 유족이 강력하게 항의하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의 분노가 치솟자, 육영재단은 서둘러 금메달 찾기에 나섰다. 그리고 그 소재가 밝혀졌다.

손기정이 국가에 기증한 금메달은 박근령 이사장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한 기사는 이렇게 썼다:


고(故) 손기정 선수가 육영재단에 기증한 1936년 제11회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사진)을 박서영(옛 이름 박근영) 이사장이 개인적으로 보관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전국민과 공유하기 위해 기증된 물품을 개인적으로 보관해온 것도 논란거리지만 금메달이 기증품 목록에조차 기재돼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돼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서동진 육영재단 사무국장은 10일 “손기정 선수가 지난 1979년 육영재단에 기증한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우승 금메달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워낙 중요한 물건이라 박 이사장이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육영재단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금메달을 기증 받아 이사장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게 된 경위와 금메달이 기증품 목록에 기재돼 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못하고 있어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소재가 밝혀진 뒤에도 육영재단은 금메달을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유족과 언론이 금메달과 월계관의 보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공개할 것을 요구했으나, 재단은 이를 거부했다.


손기정이 기증한 금메달은 어느 새 육영재단 전시관에서 박근령 개인 소유의 어딘가로 옮겨졌다. 그리고 기증품 목록에도 빠지게 됐다. 그러니 육영재단 직원들은 금메달을 본 적도 없고, 목록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금메달은 어느 누구도, 손기정 자신도 볼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는 '손기정 금메달 반환 운동'이 벌어졌다. 남의 나라에 빼앗긴 유물도 아니고, 자기 나라 정부에 믿고 맡긴 기념품을 다시 반환하라는 운동이 벌어지다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 눈에 띄지 않는 동안 손기정의 기념품은 엉망으로 관리됐다. 위에 인용한 YTN 기사는 이렇게 썼다: "전시관 안에 있는 다른 기념품 관리는 더 엉망입니다. 온도와 습도 조절이 안돼 유리관 안 쪽에 수증기가 끼어 있을 정도입니다."

금메달을 박근령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많은 사람은 금메달의 보관 상태를 걱정했다. 보관 사실을 밝힌 뒤에도 공개를 일절 거부하는 것은 금메달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라는 의심이 잇달았다. 손기정 유족을 중심으로 하여 2005년에 따로 만든 손기정기념재단의 강형구 이사장은 "손옹이 기증할 때 이미 금메달에 스크래치(흠집)가 몇개 있었다. 금메달이 도금이기 때문에 정밀한 보존장치 없이 개인적으로 보관했다면 심각하게 훼손됐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현재의 금메달 모습은 이렇다:




앞면은 도금이 거의 다 벗겨졌다. 손기정이 육영재단에 기증할 때 있었던 흠집은 지금도 선명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금메달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공개되지도 않은 채 어딘가에서 15,6년 동안 굴러다니는 동안 이런 꼴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금메달을 비롯한 손기정의 기념품은 '우여곡절 끝에' 2009년 11월에 육영재단에서 손기정기념재단으로 넘겨졌다. 손기정이 1979년에 육영재단에 기증한 물품은 1천500여 점이었다. 손기정기념재단이 30년 만에 돌려받은 물품은 282점이었다.

손기정의 금메달과 월계관은 2012년 4월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물품들은 현재 서울 중구 만리동 손기정체육공원 안에 있는 손기정기념관에서 보관,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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