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지상주의 사회의 샌델 섞일雜 끓일湯 (Others)

살다 보면 놀라운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이런 말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아 자꾸 곱씹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들은 충격적인 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컨닝도 실력이다'라는 말이다.

오래 전에 쓴 '운은 실력이 아니다'라는 글에서 이 말과 관련해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지금도 믿기 어렵지만 "시험 볼 때 컨닝도 실력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명색 대학원에서 공부를 한다는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 주장을 떳떳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은 컨닝도 실력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컨닝도 실력'에 비하며 '운도 실력'은 훨씬 소박하고 무해하지만, 결과가 실력을 증거하고 입증한다는 결과 지상주의라는 점에서 같은 뿌리에서 자란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나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공부, 학문이라는 것이 그저 직업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을 뿐, 옛날처럼 마음을 닦고 도리를 익혀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일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깨닫게 해준 화두 같은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보다 더 전에 '학력은 지성인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에서도 한 번 사례로 들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지도층 예비군들이 일상에서 드러내 보이는 의식의 편린들은 사회를 지도하기에는 너무나 개탄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어서, 이들의 뜻이나 방식대로 사회가 지도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태가 종종 벌어진다. 예컨대 나는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는 웹사이트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논쟁을 기억한다. 시험 부정행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어떤 유학생은 들키지 않고 부정행위 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말의 내용이나 그런 사고방식도 놀라웠지만, 이런 말을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버젓이 드러내놓고 한다는 사실도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누가 나에게 똑같은 말을 한다면, 나는 또다시 충격을 받고 놀라게 될 것인가? 별로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수단, 방법이 어땠든 목표만 이루면 된다는 아이디어는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아주 보편적이 된 것 같아서, 이제는 저따위 말을 들어도 혀는 찰지언정 예전처럼 놀랄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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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많이 팔린 것은 특이한 출판 현상이다. 2014년 5월 출판사 계약 종료 시점까지 모두 123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유독 한국에서만 이 책이 인기인 점을 놓고 특이한 사회 현상으로 짚어내려는 시각이 있고, 그래서 <월 스트리트 저널>의 기사 같은 것도 나왔다.

나는 샌델의 책이 '많이 팔린 것'이 특이한 현상이라고 했다. '많이 읽힌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번역되어 팔린 책 123만 부가 모두 읽혔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123만부 중에서 제대로 읽힌 책보다 트렌디한 유행을 좇아 팔리고 굴러다니다 책장을 장식하게 된 책이 더 많지 않은가 의심한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예컨대 이렇다. 위의 <월 스트리트 저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심지어 서울시장인 박원순조차 (자신의) 정책들에 대해 샌델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샌델은 의료보험안 같은 것은 박 시장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말했다.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저자에게 구체적인 정책 자문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샌델의 책은 무엇이 옳고 그름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중요하다, 즉 결과보다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샌델은 의료보험 정책에 대한 박원순의 질문과 학교 의무급식에 대한 홍준표의 질문에 거의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샌델이 2014년 12월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시는 'Justice & Citizen Rights in Seoul'이라는 영문 자료를 만들었다. 서울시 정책에 '정의가 반영된' 19개 사례를 모아 만든 자료라고 한다. 서울시가 이 영문 자료를 만든 이유는 샌델이 학교 수업에서 참고로 쓰라고 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영문 보도자료는 이곳.)

뿐만 아니다. 정의에 대한 책이 폭발적으로 팔렸다고 해서 사회의 윤리적 감수성이 눈에 띄게 증대된 것 같지도 않다. 그보다는 자의적 정의, 자기류의 정의를 실천하는 정의의 사도들만이 이러한 정의 마케팅에 힘입어서 더욱 탄력을 받은 것 같다. 이런 정의의 사도들의 사고방식, 혹은 정의가 구현된 정책이 담겼다고 내미는 자료집 같은 것들이 샌델의 책과 거리가 있다는 점은, 그의 책이 어떤 윤리적 판단에 다양한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쓰였음을 고려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양상을 보면, 한국에서 하버드 교수 샌델과 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책의 주제인 '정의' 등은 사회 윤리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로서 숙고된 것이 아니라 명품 옷과 장신구들처럼 그저 소비되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책은 123만 부 팔렸으나, 한국 국민으로부터 123만 번의 숙고와 각성과 지혜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또다른 기사에서 샌델이 한국에서 락 스타나 연예인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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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의 원래 제목은 <정의: 무엇이 옳은 일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다. 원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의 주제는 철학 일반이 아니라 윤리학이다.

정의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 체계(ethics), 그리고 이러한 판단을 행동으로 실현하는 의지(morality)라는 두 측면에서 윤리와 뗄래야 뗄 수 없다. 샌델의 책은 정의에 대한 것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를 판단할 때 동원해야 하는 여러 윤리적 기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책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그런 행위에 따라 발생하는 결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가 이루어지는 의도로 성립된다. 중요한 것은 동기이며, 바로 그 동기가 윤리적인 성격이어야 한다. 어떤 행위 자체가 옳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속셈 때문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칸트는 "선한 의지는 그것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고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해서 선한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선한 의지는 그것이 의도한 성과를 만들어 내든 아니든 그 자체로 선하다. "설령 ... 이런 의지가 스스로를 구현할 힘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또 의지에 따라 모든 노력을 다 하는데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 선한 의지는 그 자신에 담긴 완전한 가치 때문에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게 된다."


칸트까지 갈 내용도 아니지만, 어쨌든 123만 부가 팔린 한국에서라면 상식처럼 되어 있어야 할 이야기일 것이다.

칸트 부분을 조금 더 보자.


칸트가 말한 이와 같은 추상적인 시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구체적인 도덕 질문을 하나 생각해 보자: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속을 하는 것이 대체 옳은 일인가?

예를 들어 내가 지금 돈이 급히 필요해서 당신에게 좀 빌려달라고 했다고 치자. 나는 가까운 시일에 이 돈을 갚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런데도 즉시 돈을 갚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거짓으로 하면서 돈을 꾸는 일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 칸트는 분명히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중략)

(칸트가 볼 때) 거짓 약속이 도덕적으로 잘못인 이유는 전체적으로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리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결과도 벌어지겠지만.) 그게 잘못인 이유는 거짓 약속을 함으로써 나의 필요와 욕구(이 경우에는 돈)를 다른 사람의 그것에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샌델은 이 책에서 칸트를 다룬 제5장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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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8기 출신 정치인 김종필은 군복을 벗었다가 다시 입은 특이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1961년 5.16 쿠데타가 벌어지기 직전인 2월15일 중령으로서 강제 전역했다. 군 항명 사건인 '16명 장교 사건'의 주요 인물로서, 핵심 정치인들을 찾아다니며 군 내부 숙군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일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군복을 벗은 김종필은 3개월 동안 쿠데타 준비를 했다. 강준만이 쓴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에 따르면, 김종필은 "(5.16의) 사실상의 준비는 내가 군복을 벗고 뛴 석 달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늘 자신이 '혁명의 아버지'임을 자부하였다고 한다.

처삼촌 박정희와 손잡고 정권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 뒤 김종필은 다시 중령으로 복귀하였으며, 처음 만들어진 중앙정보부의 제1대 부장이 되었다. 그 뒤 대령, 준장으로 고속 승진했음은 물론이다.

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5월8일 <경향신문>에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인물기가 실렸다. 그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김종필 씨는 그의 수많은 (중앙정보)부원들에게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쳐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소위 혁명주체세력에 붙었네 하고 까닭(애국적 목적관) 없이 덤비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헌법을 짓밟고 무력으로 정권을 가로챈 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95년에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또다른 정치 군인들에 대한 내란죄 등 고소 사건에서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한 전례가 없다'는 기괴한 논리로 공소권이 없다고 주장하며 관련자 58명 전원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행위 과정이야 어찌됐든 행위의 결과가 좋다면 문제 없다는 인식은 무척 오래 전부터 독버섯처럼 꾸준히 퍼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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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박정희가 한국 사회에 10월 유신의 쇠사슬을 채울 때 폐지시킨 국회의 국정감사는 1988년에 와서야 다시 살아났다. 16년 만의 국정감사인데다 전두환 정권의 5공 비리에 대한 질타가 높던 때라, 이 해 국정감사는 5공 비리에 초점이 맞춰졌다. 국감장에 불려나온 전 정권 관계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명을 했다. 변호사 조영래는 신문 칼럼에서 이 파렴치한 작자들을 1) 발뺌형 2) 궤변형 3) 철판형으로 분류했다.

그 중 궤변형에 해당하는 허문도에 대해 조영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언론 통폐합의 주역이었음을 떳떳이 내세우는 허문도 씨의 말을 들어보면 6.29와 민주화의 1등 공신은 아무래도 허씨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는 '난세에 대응하는 혁명 조치'로서 '언론 개혁'을 했고 그 때문에 '언론의 독립성이 강화'되었고 '그 바탕에서 6.29 선언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중략) 허문도 씨의 논리는 결국 "내가 네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네가 자립정신이 강화되어 오늘날 이만큼 성공하게 된 것이 아니냐" 하는 식의 궤변에 지나지 아니한다.


네 아버지는 죽었지만 너는 그 덕분에 자립정신이 강화되어 성공했으니 좋은 일 아니냐. 이런 논리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있을까. 예전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솔직히 확신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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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달을 보라고 했더니 왜 손가락을 보는가!

이것은 원래의 뜻과 실제 사용이 괴리된, 오용된 아포리즘의 대표적인 사례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자세히 보겠지만, 여기서는 굽은 손가락으로는 달을 제대로 가리킬 수 없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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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에 대한 평가를 근거로 그 과정을 벌하지 않으며, 따라서 속이든 훔치든 빼앗든 컨닝을 하든 학력을 속이든 친일을 하든 독재를 하든,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결과만 이룬다면 대접해 주고 존중하는 분위기는, 그렇게 속고 뺏기고 당하는 놈이 잘못이고 무능하다는 인식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거대한 사회적 학습의 장이다.

이런 사회에서 윤리학 교과서가 베스트 셀러가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기한 사회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일을 지겨워하는 사회, 결과 지상주의를 교육하는 실전 교과서가 거대한 쓰나미처럼 넘실거리는 사회에서, 한 외국 철학자의 윤리학 개론 교과서 하나가 그저 명품처럼 유행처럼 소비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그런 증거는 오늘도 숱하게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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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5/04/27 16:0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4/28 11:5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4/28 13:4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6/01 21:1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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