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수교 50주년 잔치에서 빠진 것 때時 일事 (Issues)

오늘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환자 세 명이 새로 생겼고 두 명이 새로 죽었다.

그러나 이제 이 정도 앓고 죽는 것은 톱 뉴스가 되지 않는다. 텔레비전 뉴스는 새로운 희생자 발생 소식이 아니라,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각각 자기네 나라에서 열린 한일 수교 50주년 행사에 참석한다는 것을 첫 뉴스로 보도했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대통령에서부터 병원협회, 관광업계, 시장 상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인 판이다. 이렇게 사회 다양한 부문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강력한 압력을 형성하는 이슈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사태가 빨리 진정되기를 바라는 마음 한편으로, 심각한 일이 심각하지 않게 다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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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와 국교를 맺은 기념일은 경사스러운 날이라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두 나라가 약간의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각각의 원수가 흔쾌히 기념 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하기로 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가 일본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수교 기념일이랍시고 마냥 축하만 할 수 없는 역사가 있고, 그것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더구나 흔히 그렇듯이 어떤 과거사가 잊히기를 바라는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1965년 6월22일 체결했고 이제 그 날을 기념한다는 한일 수교(한일기본조약)는 당시 대한민국 국민의 격렬한 반대와 항의 속에 박정희 군사정부가 독단적으로 추진하고 체결한 것이다. 전후 배상권 문제와 국교 정상화가 함께 얽힌 한일 협상은 이미 195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으나, 두 나라를 어떻게든 봉합하고 싶었던 미국 뜻과는 달리 양국 주장이 크게 달라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이런 상황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뒤 크게 달라졌다. 무력 정권을 추인받고 경제 성장을 통해 집권을 정당화하려던 박 정권은 일본과의 과거를 대충대충 정리하고 돈을 챙기는 데 적극 나섰다. 이에 따라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수십 년에 걸친 일본의 강점이 한반도의 땅과 사람과 그들의 정신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가. 그런데도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지 않고 챙길 것을 챙기지 않은 채, 정권 유지를 위해 서둘러 진행하는 굴욕적인 국교 정상화가 설득력이 있을 리 없었다.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그 전해(1964년), 정부가 대일 협상 일정을 발표하자마자 국민은 크게 반발했다.

전국에서 학생을 주축으로 하는 반대 시위가 전개되었다. 정치권에서는 모든 야당이 일치단결하여 '대일저자세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기구는 곧 확대되어 사회, 종교, 문화 단체를 아우르는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되었다.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의 항의 시위

대일굴욕외교반대 성토강연회장에 구름처럼 모인 시민들


학생 시위는 64년 6월에 최고조에 달했다. 헌법을 뒤엎고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했던 박 정권은, 한일 협상에 대한 반대가 거세지자 당연한 듯 또다시 군대를 끌어들였다. 서울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무장한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을 진주시켜 협상에 반대하는 항의를 무력 진압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3일 하오 9시40분 대통령공고11호로 동일 하오 8시로 소급하여 서울특별시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 선포와 동시에 수도 서울엔 4일 자정부터 계엄부대인 수도경비사 예하 병력이 진주했으며, 시내 요소요소는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경비행위를 개시, 수도 치안은 완전히 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동아일보> 1964년 6월4일자)


계엄은 두 달 가까이 지속됐다. 반대 시위에 나섰던 시민과 학생들은 거리에서 얻어맞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한국 학생 민주화운동의 흐름, 즉 4.19 세대 - 6.3 세대 - 유신 세대 - 386 세대로 이어지는 흐름 중에서 6.3 세대가 바로 대일 수교 반대 투쟁에서 비롯됐다. 김덕룡, 이재오, 손학규, 김근태, 이부영 등이 여기 속한다. 심지어 이명박도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했다.

1965년 6월22일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의 국회 비준은 정부 여당이 단독으로 처리했다. 한일 국교 수교는 이렇게 군사정권이 국민의 반대를 억누르며 독단적으로 강행해 이루어졌다.

조약 체결로 일본은 과거의 강점에 대해 사과할 필요도, 식민지 지배로 피해를 본 한국인에게 배상할 필요도 없어졌다. 국가의 정기, 국민의 뜻, 실질적인 이해관계...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 외교 협상을 할 때 고려해야 할 이 모든 것을 배반한 채 정권 안보를 위해 서둘러 체결된 수교는, 그 뒤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악의 씨앗이 되었다. 이제 뜨거운 국제 이슈로까지 떠오른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할 것은 다 했으니 배째라라고 나오는 것도, 50년 전 박정희 정권이 모든 것을 퉁치기로 하는 수교 조약에 서명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기념일처럼 기억되는 한일 수교 뒤에는 이렇게 피로 쓰인 역사가 있다. 그저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굴욕이 저절로 영광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과거를 도마뱀 꼬리 자르듯 끊어내고 싶어하는 자들에게는 역사가 그렇게 잊히고 변질되는 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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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국가수호 2015/06/27 21:28 # 삭제 답글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2015/08/07 09:5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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