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끼듯 수집하는 일 섞일雜 끓일湯 (Others)

글을 쓰거나 쓰려는 사람치고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들여다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좋은 글, 바른 글을 쓰기 위해 명심해야 할 사항을 모아 적은, 글쓰기 지도서의 고전이다.

여기서 이태준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수련법으로 명문장 베끼기 같은 것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베끼고 수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문학 수련을 언급한 대목이 있긴 하다.


그러므로 평소에 여러 인물이 여러 가지 경우에 무심코 내뱉는 말투를 베끼듯 수집할 필요가 있다. 수집한 어록을 그대로 쓸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요, 또 쓰려는 내용에 맞도록 고친다 하더라도 결국 그 어감이 느껴지도록 고치는 실력은 베끼듯 수집하는 일을 통해 쌓여지는 것이다.


이 부분은 글에서 대화문을 통해 등장 인물의 성격이나 특징을 보여주려 할 때, 그 인물에 꼭 맞는 말투를 찾아야 함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베끼듯 수집하는 대상은 남의 글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대화)이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잘 관찰하고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것인데, 결국 취재를 잘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남이 이룬 성과를 베끼는 수련은 책을 한보따리 싸들고 처박혀 두문불출하면서 펜대만 놀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이태준의 수련은 귀를 세우고 눈을 열고 발을 움직여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수 있다.

<문장강화>에는 비슷한 맥락에서 눈에 뜨이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남이 이미 해 놓은 말을 쓰는 것은 흉내다. 세월이 빠른 것을 '유수 같다'라고 한 것은, 처음 말한 그 사람의 발견이다. 정도 문제지만 남의 발견을 써서는 안 된다. 특히 문장에서야말로 이런 윤리의식이 필요하다. 될 수 있는 대로 나는 나로서 발견해 써야 한다.


여기서 이태준이 경계하는 것은, 남이 만들어 낸 독창적인 단어 따위를 상투적으로 답습하는 일이다. 그런 걸 놓고도 '문장에서의 윤리의식'이라고 했다. '유수 같다' 같은 말에서조차 윤리의식을 꺼내는 그의 문장 태도는, 모든 분야에서 윤리 감각이 둔감해진 우리가 보기에는 낯설기까지 하다.

이제 남이 쓴 구절들을 제목이며 본문에 통째로 베끼다시피 붙여넣어 문학의 대표가 되고 베스트 셀러가 되는 세태를 이태준이 본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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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앞 부분은 모방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구를 모방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술이란 모방의 작업임을 규명해 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시(詩, 더 나아가 예술 일반)는 인간 본성 깊숙히 자리하는 두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첫째로 어렸을 때부터 인간에 깃들어 있는 모방 본능이다. 인간은 가장 모방적인 생명체이며 모방을 통해 최초의 지식을 얻는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람은 다른 동물과 차이가 난다. 둘째로 인간은 모방된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우리는 이런 점을 경험적 사실로 증명할 수 있다. (4장)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이란 곧 모방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모방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예술품을 베끼고 흉내내는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은 의식적인 예술 창작을 위해서나 단순한 습관에 의해서 다양한 사물을 색과 형태로 모방하거나 표현한다. 혹은 목소리로 그럴 수도 있는데, 따라서 앞서 언급한 예술 형태들을 총괄해서 보자면 모방은 리듬, 언어, 하모니를 단독으로 혹은 복합하여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장)

모방의 대상은 행위하는 인간이고, 그런 인간이란 고상하거나 비열하기 마련이므로, 우리가 표현하는 인간은 실제보다 잘난 이들이거나 혹은 실제보다 못난 이들이다. (2장)


예술이 모방하고 그럼으로써 예술이 되는 모방의 대상은 인간과 사물, 즉 현실이다. 예술가가 예술가인 한, 그가 공들여 베껴 써야 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말이기도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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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은 최고의 찬사(혹은 존경)'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흔히 'Imitation is the sincerest form of flattery'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모방은 가장 신실한 아첨이라는 뜻이 된다. 앞의 한국어 표현에 나오는 찬사, 존경과는 조금 다른 어감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의 모방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예술의 본질로서의 모방이 아니라, 남의 예술이나 기술을 흉내낸다는 뜻으로서의 모방이다. 이런 경우 모방은 대개 창작의 방법이나 양식, 글로 말하자면 문체 같은 것이 그 대상이 된다.

다른 사람의 완성품 자체를 그대로 베낀 뒤, 마치 애비에미 없는 후레자식처럼 그 예술적 부모도 밝히지 않고 자신의 것처럼 발표하는 행위는 찬사, 혹은 존경도 아니고 아첨도 아니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는 다른 이름이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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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썼던 톰 레어러의 풍자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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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7월30일 23:00)

나는 글을 시작할 때, 이태준이 <문장강화>에서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수련법으로 명문장 베끼기 같은 것을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의 수필집 <무서록(無序錄)>에는 '모방(摸倣)'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여기서 그는 문학 작품을 제대로 감식하는 방법으로서 베끼기가 어떨까를 생각하여 본다.

이태준은 지인과 함께 완당(阮堂, 김정희)의 글씨를 구경하러 가서, 족자 두 폭에 종이를 대고 스물넉 자를 베껴온다. 집에 와서 이 자형에 먹칠을 채워넣는다.


그런데 이 두 폭 24자를 먹칠만 하기에 나는 이틀 저녁에 세 시간 이상씩 걸리었다. 완당이 자유분방하게 휘둘러 놓은 획 속에 나는 이틀 저녁을 갇혀 있었다. 완당의 필력, 필의(筆意), 필후(筆後)를 이틀 저녁을 체험한 셈이다. (중략) 완당의 획은 어떤 성질의 동물이란 것이 만져지는 듯하다. 화풍이나 서체를 감식하려면 원작자의 화풍, 서체를 이해해야 하고, 이해하자면 보기만 하는 것보다 모사하는 것이 훨씬 첩경인 것을 느꼈다. 완당서(阮堂書)를 아직껏 천 자를 보아온 것보다 이 이틀 저녁 24자를 모사해본 데서 나로서의 완당 서안(書眼)은 갑절 는 셈이다.

감식은 모든 비평의 기초일 것이다. 문학도 감식에 어두워선 작자와 작품의 정체를 포착지 못할 것이다. 비평가가 읽기만 하고 얻기 쉬운 것은 애매한 인상일 것이다. 한번 그 작품을 모사, 베껴본다면 그 작품은 그 평가(評家)에게 털끝만한 무엇도 가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모방에 이처럼 미덕의 일면이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서예 작품에서 시작해 문학 작품에 대해서도 베끼는 일의 유용성을 제안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세 가지 이다.

첫째, 이태준이 모방해본 것은 김정희의 서예 작품이다. 서체의 윤곽을 베껴와 색을 칠해보는 것, 혹은 그림을 필사해 보는 것과 문학 작품의 문장을 베껴보는 것은 예술 분야 속성상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서예나 회화 같은 시각적 예술은 그 외양 자체가 중요한 장르다. 외양을 베껴 보는 것은 작품의 전모를 직접 이해하는 행위라고 할 만하다. 반면 문학은 대개 시각 예술이 아니고, 따라서 '베끼기'가 줄 수 있는 감식적 유용성도 2차적이거나 추상적인 차원에 머무르게 된다.

이 점을 이태준이 어떻게 설명할지는 알 수 없다.

둘째, 이태준이 문학 작품 베끼기의 유용성을 검토하는 부문은 창작이 아니라 감식과 비평의 영역이다. 내용을 보면 주로 비평가를 대상으로 하여 말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작품을 베껴서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비평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점은 그가 소설을 제멋대로 씹고 까는 비평에 여러 차례 불만을 드러낸 것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태준의 문학 베끼기는 문장 수업으로서가 아니라 제대로 읽기의 차원인 셈이다.

비평이 아닌 창작에서의 규범은 위에 쓴 부분, 즉 "남이 이미 해 놓은 말을 쓰는 것은 흉내다. 세월이 빠른 것을 '유수 같다'라고 한 것은, 처음 말한 그 사람의 발견이다. 정도 문제지만 남의 발견을 써서는 안 된다. 특히 문장에서야말로 이런 윤리의식이 필요하다"라고 한 데서 다 드러난다.

셋째, 모방의 악용, 즉 이렇게 베낀 것을 자기 것처럼 내놓는 행위는 이태준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추사 작품의 필사본에 자기 낙관을 찍어냈다면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서예고 서화고 문학이고를 다 떠나, 이런 일이 속고 속이며 서로를 갈취하는 시정(市井)이 아니라 문화의 범주 안에서 벌어지는 지경은 그에게는 상상두절의 일이었으리라.

 

덧글

  • 2015/07/01 23:0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7/17 12:4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7/23 03:3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7/24 10:0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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