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출처

실증주의적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서, 수전 손택과 같은 스타일의 글을 편하게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글이 아니라 나를 제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일의 글을 읽노라면, 주장과 단정이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증거를 요구하고 거론된 사례의 보편성을 점검하며 반례(反例)를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글을 밀고 나가려면 그런 나와 계속 타협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분명히 지적 자극이 된다. 책의 메시지는 나에게 지속적인 도전이 되고, 나는 자꾸 생각을 해야 한다. 책의 귀퉁이들은 자잘한 연필 메모로 가득 찼다. 그러기 위해 예쁜 '샤프 연필'도 하나 샀다. 이것은 즐거운 고통이다.

다만, 앞에서 본 것처럼 틀림없이 번역의 문제라고 짐작되는 데서 나오는 많은 고통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이 부분은 조만간에 본격적으로 보기로 하고.

<타인의 고통>의 메시지는, 그것이 비평적인 문예 언어로 표현되든 실증적인 수리 언어로 표현되든, 이제는 보편적인 아이디어가 됐다.1 물론 이렇게 보편적이 된 데에는 이 책의 통찰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책이 나온 지 10년도 더 되었음을 상기해 볼 만하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보자면,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었다(번호는 내가 붙였다):


(1) 나는 <예일 비평저널>에 실린 나탈리 M. 휴스턴의 '빅토리아 시대의 유품 읽기: 크림 전쟁 당시의 소네트들과 사진들'에서 로저 펜턴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2) 펜턴이 찍은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인 계곡'에 두 가지 판본이 있다는 이야기는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 재직하고 있는 마크 호워스-부스에게 들었다. (3) 이 두 가지 판본은 울리히 켈러의 <최고의 스펙터클: 시각 자료로 본 크림 전쟁의 역사>에 실려 있다.


이것은 본문이 아니라 책의 맨 뒤에 붙어 있는 '감사의 말(Acknowledgements)'의 한 대목이다.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중에, 본문에서 사용한 한 사진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를 밝힌 부분이다.

손택은 세 가지 출처를 명시했다. 해당 사진의 직접적인 출처(3)는 맨 나중에 나온다. 그보다 앞에 세운 출처는 (1) 첫째로 그런 사진작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는가이고 (2) 둘째로 해당 사진과 관련한 이야기를 누구로부터 들었는가다. 책이나 논문에서 본 것뿐만 아니라 남에게 들은 이야기까지 출처로 밝혀둔 것이다. 원문에서는 (1)에 대해 "I am indebted to...", (2)에 대해 "I owe the information that..."라고 해서, 모두 빚졌다는 표현을 썼다.

오래 전에 미국의 한 학부 수업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면서 '누구한테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런 점까지 모두 출처로 밝히라'고 강조하는 것을 인상 깊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잘 실천한다면, 말하자면 손택처럼 될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서술의 전거를 대는 출처 표시와 지적인 부채를 사례하는 감사의 말은 그 목적이 조금 다르기는 하다. 그러나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함으로써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하지 않고 내 생산물의 지적 연원을 밝히려는 윤리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손택이 시대를 읽고 세상을 통찰하는 전방위적인 문예비평가로서 존경할 만한 일가를 이루었지만, 나는 그녀가 내미는 메시지의 내용을 보기 전이라도 이러한 '감사의 말'에서 이미 그 저자의 인격과 메시지의 진중한 가치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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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2000년에 크로아티아 출신 학생과 함께 코소보 전쟁을 보도하는 미국 시사잡지들의 사진을 분석하는 논문을 쓰고 학회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연구의 결론은 보도되는 전쟁 이미지의 많은 부분이 편중되고 전쟁의 다양한 측면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연구는 물론 1990년대에 걸프 전쟁의 보도 이미지를 통계적인 방법으로 분석하였던 여러 실증주의 학자들의 연구에 힘입은 것이다. 말하자면,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전쟁 이미지의 특성에 대한 연구는 그 접근 방법에 상관없이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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