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물리학적 검토 말씀言 말씀語 (Words)

문학상 수상작들을 모아 엮은 책을 몇 권 읽었다. 취향에 안 맞는 성긴 소설들을, 비육 거위 주둥이에 사료 쑤셔넣듯 억지로 꾸역꾸역 읽는 일을 견디다가, 이태준의 단편소설집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다시 찾았다.

문장이란 쓰는 사람의 개성과 특색을 반영하게 마련이고, 또 그래야 좋은 문장일 것이다. 이렇게 그 색이 원래부터 다르게 마련인 존재로부터 옳은 것, 완전한 것을 가려낼 수 있을까? 나는 의심한다. 그러나 그른 것, 불완전한 것은 얼마든지 존재하고 또 발각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개성이나 특색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잘못 쓰이거나 게으른 문장은 누가 써도 잘못이고 게으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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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이 쓴 <문장강화>의 백미는 퇴고의 실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나는 이 대목을 볼 때마다, 문장을 쓴다는 것이 그저 감성이나 감상으로만 완성되는 일이 아님을 깨닫곤 한다. 글을 쓰는 것은 형체가 없는 아이디어를 글이라는 구체적인 도구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보고 느끼는 것은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영역이지만, 이를 문자로 옮기는 일은 논리적이고 규범적인 작업이다. 후자에 주의하지 않으면 문학 지망 청소년이 써낸 습작처럼, 얼핏 보기엔 멋지지만 조금만 씹어보면 말이 안 되거나 무의미한 문장들이 졸연히 등장하게 된다.

<문장강화>는 아이디어를 글로 형상화하는 과정이 상식과 순리의 모든 측면에 비추어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검증된 법칙과 공리를 충실히 따르며 선을 긋고 착오를 수정해 가는 경건한 자연과학적 태도 같기도 하다. 문장의 물리학적 검토랄까.

<문장강화>의 퇴고 작업이 수행하는 논리적 점검은 아래와 같은 식이다(회색 부분은 내가 끼워넣은 것이다):


이태준이 든 예시문:

교문을 나선 제복의 두 처녀, 짧은 세일러복 밑에 쭉 곧은 두 다리의 각선미, 참으로 씩씩하고 힘차 보인다. 지금 마악 운동을 하다 돌아옴인지, 이마의 땀을 씻는다. 얼굴은 흥분하여 익은 능금빛 같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은 참으로 기쁘고 명랑해 보인다.

(우리가 보기엔 문제가 별로 없는 글 같다. 그러나...)

△ 우선 '각선미'란 말과 '흥분'이란 말이 당치 않다. 배우나 성숙한 여인이 아니요, 아직 세일러복을 입는 중학생에겐 설혹 다리가 곱더라도 '제법 각선미가 나타나는' 정도로는 쓸지언정, 결정적으로 '각선미'라고 지정해 쓰는 건 과장이다. 또 감정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육체적으로 운동을 해서 이글이글해진 얼굴을 '흥분'으로 부르는 것도 오진이다. '흥분'은 감정 편을 더 가리키는 말이다.

△ '두 처녀'와 '두 다리'가 맞지 않는다. 다리가 하나씩밖에 없는 처녀들이 된다. 그렇다고 '네 다리'라 하면 너무 산술적이 된다. 그러니까 둘이니 넷이니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다리들' 하면 될 것이요, 또 '교문을 나선'이란 말도 오해되기 쉬운 말이다. 수업 후의 하교로보다 '졸업'을 더 연상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머리의 '교문을 나선'은 명사나 동사를 바꿔놓는 것으로 얼른 고쳐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교문을 나선'이란 말에서 '졸업'이란 추상성을 없애기 위해선 '교문'과 나서는 학생들의 모양과 '제복'을 좀 더 현실감 나게 묘사할 필요가 있다.

△ 인상이 선명치 못하다. 어지럽게 하는 데가 있다. 교문을 '나온' 이 아니라 '나선'이요, 얼굴을 먼저 말한 것이 아니라 '쭉 곧은 두 다리'를 말했다. 확실히 뒤에서 보는 인상이다. 독자는 저쪽으로 사라져가는 두 여학생을 머릿속에 그리며 내려가는데, 갑자기 '돌아옴인 듯'이란 앞을 향한 듯한 인상의 말이 나왔다. 어지럽게 된다.

(위의 내용을 수정한 뒤) 이렇게 하고도 어지러운 데가 하나 남는다. 동작들이 모호한 것이다. '쭉 곧은 다리들'에서는 돌아선 뒷모양이 느껴지고, '씩씩하다'에서는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활발히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두 여학생이 가볍고도 또박또박한 걸음으로 돌아서 가는 모양이 독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런데 '이마의 땀을 씻는다. 얼굴들은'에서부터는 앞에서 보는 듯한 설명이다. 여기에 이 글의 대수술을 면치 못할 운명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수술할 것인가? 전반을 기준으로 잡아 두 여학생이 뒷모양으로 사라지게 할 것인가? 후반을 기준으로 삼아 앞을 향해 오게 할 것인가?

(이 다음 부분에서 이태준은 그렇게 두 가지 기준을 각각 적용한 두 편의 수정글을 만들어 본다.)


상상이나 묘사와 실체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메우려면, 즉 머리 속의 것이 현실적 설득력을 가지려면 이렇게 치밀하게 따지면서 현실을 축조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대충 써도 대충 이해는 된다. 심지어 안 쓰고 웃기만 해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제대로 쓰자면 위와 같은 작업을 생략할 수 없을 것이다. 프로 작가들이 글을 쓰면서 그렇게 상식과 순리로 문장을 빗질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전문가주의를 포기하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순진한 독자들은 적절히 속아줄 것이고, 또 근친스럽고 자의식 과잉인 수다스런 평(評)들은 그런 허물을 부지런히 덮어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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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1 2015/07/24 14:12 # 삭제 답글

    우연하게 들렀다가 재밌는 글 잘 보고 갑니다.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그 이름만 듣고는 여태 잊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요새 소설 쓰는 사람들도 잘 쓰는 이가 많은데, 무슨 선집을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 deulpul 2015/07/27 21:09 #

    구체적인 사항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예컨대 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어떤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거센 빗줄기는 분무하듯 내리꽂혔다."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랄지 고함 같은 것들이 꼭 닫아 걸어놓은 창 바깥으로 신음처럼 뒤엉켜 새어들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중에) 이파리가 바닥에 떨어져 나동그라졌다."
    "양반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다."
    "공터를 밀어내고"

    <문장강화>가 퇴고에서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들이지요. 맥락은 좀 다릅니다만, 같은 상을 받은 소설로 다른 책에 묶인 어떤 작품은 '마찌꼬바(まちこうば, 町工場)'를 계속 '마찌꼬방'이라고 잘못 쓰고 있더군요...
  • 2015/08/07 15:2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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