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님 말씀, 맹자님 말씀 섞일雜 끓일湯 (Others)

예전엔 추석날 차례를 지내고 오후에 종로나 대학로에 나가 홀로 영화를 보는 것이 관습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런 일을 다시 해 보았다. 지하철 대신 일부러 느린 버스를 타고 뒷좌석에 앉아, 길을 꽉 메운 차와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종로3가로 흘러갔다.

오늘의 영화는 <위로공단>이다. 서울극장에 함께 있는 독립영화 전문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중이다. 극장에 걸린 지 꽤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상영하고 있어서 고마웠다.




70~80년대의 노동 현장을 몸이나 머리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 번 보면 좋겠고, 혹은 그런 사람을 부모로 둔 사람들도 어머니 손을 잡고 가서 보았으면 좋을 듯싶다. 영화의 주제는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오늘날 노동을 하거나 노동하기를 바라는 누구라도 보면 괜찮을 듯싶기도 하다.

영화에는 가산디지털단지역 주변이 자주 나온다. 나는 지난 7월 이후 그곳을 세 번 가봤다. 두 번은 옷을 구경하러 갔고, 최근 한 번은 일 때문에 갔다. 그곳이 예전 가리봉역이었다는 사실은 두 번째 가 본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오래 전, 그곳이 살벌하고 피곤한 전근대적 노동의 현장이었던 때에도 몇 번을 가본 적이 있다. 나로서는 같은 장소에 전개된 과거와 현재의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없었다. 이름도 달라지고 주변 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역을 둘러싼 모든 것이 세련되게 바뀌었으나, 이것이 노동과 노동자에게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즉시 알아채기 어려웠다. 그것을 알려면, 땅 위로 치솟은 화려한 건물로부터 눈을 거두고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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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란 녹록하지 않다. 좀더 풀어서 말하자면, 무력한 당위와 강력한 현실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란 쉽지 않다. 둘은 대개 배타적인 개념이므로(굽실거리며 돈을 받느냐 아니면 돈 들고 온 자의 귀싸대기를 날리느냐), 하나에 고착하기는 쉽지만 둘을 중화시키기는 만만치 않다. 둘의 중화란 마치 연금술의 이론처럼, 말은 할 수 있더라도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겁하거나, 당당하거나

이 칼럼의 필자는 전유성이 쓴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책의 제목으로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비겁해서 즐거운 인생을 사는 비리 인간 군상들을 나열한다. 그러더니 영화 <베테랑>을 떠올리며 거기서 나오는 당위의 메시지에 대해 말한다. 마지막으로 또다른 영화 <위로공단>을 떠올리며 전유성의 말을 뒤집어 '조금만 당당하면 인생이 즐겁다'라고 한다.

이 칼럼의 주장을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현실과 당위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하려면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거운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살지는 말고 조금씩이라도 당당하게 살기로 하자' 정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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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강조는 내가):


부모가 자녀의 취업을 청탁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을 회피하는 비겁한 일이다. 자녀에게 ‘뒷문 입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거울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부모들로 인해 취업 기회를 빼앗긴 청년들의 입에서 “줄 없고 빽 없으면 서러운 세상, ‘헬 조선!’ ”이란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올 법하다. 그들에게 “비겁의 대가로 누리는 즐거운 인생은 한없이 경박하며,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란 얘기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되레 세상물정 모르는 ‘공자님 말씀’이란 핀잔만 돌아오기 십상이다.


언젠가 나는 전유성이 쓴 책의 제목과 관련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조금만 눈감아주면 삶이 평화롭고, 조금만 못본척하면 생활이 윤택해진다. 조금만 뻔뻔하면 좋은 자리 차지할 수 있고, 조금만 두꺼우면 주머니가 두둑해진다. 조금만 비굴하면 배가 부르고, 조금만 비겁하면 등이 따습다. "지금 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여, 나를 마음껏 비웃고 침뱉으라. 언젠가 당신들은 내 자리와 나의 성취와 나의 명성과 월급봉투와 예금통장을 부러워하게 될 테니!"

그러나 말이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도 될 것인가. '조금'의 정의(定義)는 한없이 타협적이며, 비겁의 대가로 누리는 즐거운 인생은 한없이 경박해 보인다. 그리고 그 즐거운 인생 뒤에는 대부분 누군가의 상처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런 인생을 즐거운 인생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한없이 불쌍하게 보인다. 나 역시 인생을 내 식대로, 자유롭고 즐겁게 살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 중 하나지만, 비겁하고 비굴해져가면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말하자면 나는 저 필자가 '세상 물정 모르는 공자님 말씀'이라고 한 것을 싱크로 98% 정도의 비율로 웅얼거린 것이다.

그러자니, 이렇게 무력한 공자님 말씀을 걱정하는 필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위에 썼듯, 그것은 '조금만 당당하면 인생이 즐겁다 (그러니 조금씩이라도 당당하게 살자)'라는 것으로 모이는 듯하다.

그러나 말이다. 이것은 공자님 말씀이 아니란 것인가? 공자님 말씀은 아니더라도 맹자님 말씀 정도는 될 것이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별로 위로가 되지 않고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말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따져도 그렇다.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명제에 대한 부정과 '조금만 당당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명제는 한 길에 놓여 있다. 이것은 '비겁하지 않음 = 당당함'이라는 언어 본연의 의미 구조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조금씩이라도 당당하게 사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위로공단>의 주인공들 이야기로부터 주장을 끌어낸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그들은 줄도 없고, ‘빽’도 없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지 않지만 비겁하지는 않다. 기울어진 운동장과도 같은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조금만 당당하면 인생이 즐겁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뒤집어 말하면 “인생이 즐거우려면 조금은 당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공자님보다 맹자님이 훨씬 더 심각한 지경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비판하는 무력한 당위를 스스로 반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를 그 주장의 근거로 삼지만 실은 영화를 완전히 잘못 읽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의 주장과는 달리, 이 영화는 '조금씩이라도 당당하게 사는 것'이 '비겁하게 살지 않는 것'만큼이나, 심지어 그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위로공단>에 나온 사람들 중 인생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조금만 당당하려고 하다가, 조금만 인간답게 살려고 하다가 찍히고 잘리고 얻어터지고 똥물을 덮어쓰고 미행되고 구속되고 고문당하고 해고당한 사람들이다. 그 시대에 조금만 당당하기란 바로 밥줄, 목줄을 내놓고 도박을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런 고통스런 삶이 보람은 있었을지언정,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는 식의 의미에서 즐겁다고 말하긴 어렵다.

떳떳하고 정당하게 일하고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기계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생활, 그런 상황에 저항하고 살아남기 위해 94일 동안 단식을 하고 309일 동안 크레인에서 농성을 벌이며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보며, 옆의 구경꾼들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힘겹지만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매시 매초가 신산스런 고통과 불안과 절체절명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현재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무리 일해도 따뜻한 가정 생활조차 영위할 수 없는 잔인한 소득 구조에 대해 울면서 이야기한다. <위로공단> 등장 인물들의 삶은 '조금만 당당하면 인생이 즐겁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도무지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는 노동자로서 즐겁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영화가 아니다.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영화도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는 노동 소외의 산업 구조, 그 안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지 못하며 부속품 같은 존재로 떠도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다. 이것은 즐거운 영화가 아니라 아프고 고통스럽고 눈물 나는 영화다. 나는 그렇게 봤다.

<위로공단>을 빼놓고 생각해 보자. 조금만 당당하면 정말 인생이 즐거울지 모른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람에게도 세상에게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당당하고 그로써 인생까지 즐거워진다면 일석이조, 누구나 발벗고 당당해지러 나서지 않는 사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베테랑>의 형사 부인 같은 사람은 여전히 영화 속 인물이다. 이런 사정은, 조금만 당당해서 인생이 즐거워지자는 말 역시 여전히 당위이고 희망사항임을 방증한다. 누구나 그러하다면 위 칼럼 필자는 그런 주장을 꺼내들지 않았을 것이다. 지구를 자전시키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당위의 확인, 즉 비겁해지지 말자고, 혹은 당당해지자고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잘 안 되는 일이니 서로 끊임없이 경계하고, 그것이 비록 환상이라도 잊지 말고 간직하자고 서로에게 상기시키는 일 말이다. 공자는 공자 말씀, 맹자는 맹자 말씀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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