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적 장애 의무화 법 섞일雜 끓일湯 (Others)

2급 지체장애인인 10살 지민이는 나름 유명인사다. 남의 고통에 둔감한 세상에서 장애인으로 살며 겪는 힘겨움이 대중매체에 몇 차례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민이를 유명하게 만든 건 엄마다. 장애인 딸을 데리고 다니던 엄마는, 더불어 살 줄은 도통 모르는 세상의 둔감함과 싸우는 투사가 되었다.

장애인 딸, 투사가 된 엄마 (<한국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절실한 경험은 2011년 엘리베이터와 휠체어 리프트가 고장난 고속터미널 지하철역 9호선에서 했다. 고장 난 리프트에 남겨진 지하철 당국의 안내문은 가관이었다. ‘휠체어 리프트가 고장 났으니 휠체어 이용자는 다시 9호선을 이용해 동작역으로 가서 4호선을 타고 이수역에서 내려 7호선을 타라’는 것이다. 그는 “공공시설조차 배려가 없으니 장애인은 외출하지 말라는 뜻이구나 싶었다”고 회상했다.


지민이와 엄마 홍윤희씨가 겪은 이 사례는 몇 해 전 <서울신문>의 기사 '소아암 앓아 다리 못쓰는 6살 수민이… 유모차 타고 병원 가는 길' 에도 실려 있다. 이 기사에는 문제의 안내문을 찍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기사만으로는 당시 지민이가 어디서 어디로 가려 했던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네이버 지도)


예컨대 3호선을 타고 남북으로 오가던 사람이 7호선으로 갈아타려 할 때, 리프트가 고장나서 이 고속터미널 역에서는 갈아탈 수 없다. 역이 제안한 것은 ① 3호선에서 9호선으로 갈아타 세 역을 간 뒤 ② 동작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 한 역을 가서 ③ 이수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타라는 것이다. 이 자체로도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만일 장애인 승객이 7호선 반포역이나 논현역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면, 고속터미널역에서 출발해 멀고도 고통스러운 길을 돌아 다시 고속터미널역을 지나가야 하는 꼴이 된다.

이런 경로 지정은 마치 컴퓨터 게임의 퀘스트 같다. 책상에 앉아서 게임을 돌리는 사람은 클릭 몇 번으로 어렵지 않게 저 경로를 지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락이거나 흥미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파가 북적이는 복잡하고 피곤한 지하철 역사에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갖고 이동하는 실사 인간에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장애인이 사용하도록 된 리프트가 고장났다면 무조건 빨리 고쳐야 한다. 그 사이의 공백은 사람이 메꾸는 수밖에 없다. 저런 종이쪽 나부랑이를 붙여놓고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전화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할 게 아니라, 리프트가 수리될 때까지 직원이 해당 포인트에 대기하고 있다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직접 안내해야 옳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장애인이 겪는 고통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지민이의 엄마가 투사가 되는 일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대개 투사는 날 때부터 투사가 아니라, 세상이 사람을 투사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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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하철에서 휠체어를 타고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청년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그를 도와주는 것이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한국에서 몇 달을 살면서 느낀 것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한국은 장애인을 도와주기는커녕, 제도와 사람 모두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사실, 그래서 장애인에게는 도움의 손길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울 여유가 없다는 사실, 작은 도움이나 배려가 너무나 감사할 지경이라는 사실을 나는 한국에 와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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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 가까운 사람이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나섰다. 이 점심 식사 자리는 몇몇 사람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것인데, 그 몇몇 사람 중에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도 있었다.

상당한 거리를 걸어가야 예약된 식당에 갈 수 있었다. 출발하자마자 일행은 자연스럽게 두 그룹으로 쪼개졌다. 앞선 대다수 사람은 그들이 늘 점심을 먹으러 가는 속도로 걸어갔다. 나머지 서너 명은 걸음이 느린 장애인 동료의 속도에 맞추느라 뒤로 처졌다.

뒤를 따라가는 사람은 앞선 사람이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다. 가다보니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길이 나왔다. 곤혹스런 상황이었다. 앞선 이들은 물론 이 계단을 손쉽게 내려갔다. 장애인 동료는 계단 앞에서 내게 어깨를 좀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택가 계단이라 난간도 없어서, 의지할 수단이 없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식당을 가는 길에는 계단을 통과하지 않는 경로도 있었다. 앞서서 무리를 인도하던 사람들은 그런 경로가 아니라 계단이 있는 경로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런 결정에는 상식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다. 거리가 가깝다든가 하는 이유 말이다. 아니면 그냥 늘 가던 대로 가던 습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목적지로 향하는 거리를 좁히는 것이 상식이라면, 길을 잡으면서 일행 중에 있는 교통 약자의 상황을 배려하는 것 역시 중요한 상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날 나는 뒤에서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또 하나의 상식이 흔히 잊히곤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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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야유회를 갔다. 행사 중에는 외부 레크리에이션 진행자가 이끄는 대로 각종 게임을 하는 운동회 순서가 있었다. 직장에는 장애인들이 몇 있다. 행사 안내문에는 장애인 동료들도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준비했다고 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장애인 동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순서가 거의 없었다. 한 장애인 동료는 몇 시간 동안 계속된 게임 내내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떠돌아야 했다. 심지어 외부 진행자는 그가 장애인인지도 모르고, 빙글빙글 돌다 털썩 주저앉는 게임에서 멀뚱히 서 있는 그를 탈락자로 골라내기까지 했다.

이 동료가 다음번 야유회에 또 참석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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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는 직장에는 장애인의 복리를 돕는 부서가 있다. 또 장애인의 현실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장애인을 모셔다가 강의를 듣는 기회도 자주 갖는다. 지난 10월 초에도 장애인 단체 대표가 와서 전 사원을 대상으로 하여 강연을 했다. 회사 야유회는 그 뒤에 벌어진 일이다.

다음주 월요일에 또다른 장애인 관계자가 와서 강연을 할 예정이다. 이런 강의나 강연은 사내 교육으로 간주된다.

국어를 12년 공부해도 우리말을 다 잘 쓰지 않으며, 수학을 6년 공부해도 방정식이나 함수 문제를 다 잘 풀 수 있지는 않다. 교육은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약자들에 대한 감수성인 듯하다.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가짐, 어려운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가짐, 편한 사람이 100명이 불편한 사람 1명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가짐 같은 것 말이다.

이런 감수성은 그저 몇 시간 교육을 받는 것만으로는 잘 획득되지 않는 것 같다. 무엇이 이런 감수성을 잉태하고 키워주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몸이 불편해지면 불편한 사람을 아주 잘 이해하게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장애인의 고통에 둔감한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전진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일정 기간 장애를 겪어내도록 강제하는 '한시적 장애 의무화에 관한 법률'이라도 제정해야 하지 않나 싶다. 약자를 외면하는 무신경의 벽이 너무나 높고도 견고하게 느껴져서, 그런 생각마저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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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시로 2015/10/25 14:59 # 삭제 답글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글입니다.
    저도 지금보다 어릴때는 주변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없이 제 생각만 하고 살았습니다. 아마 사회의 시스템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도 과거를 되짚어보면 조금씩 발전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의 인식들이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배려가 없다고 해도 과거보단 분명히 나아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앞으로도 매체나 캠패인 등을 통해 타인을 배려하는것이 부끄럽거나 불필요한 행동이 아닌것으로 계속해서 바뀌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deulpul 2015/11/19 20:23 #

    많이 나아졌다! 이것은 분명하고도 명백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뒤에는 장애인을 포함한 많은 분의 눈물겨운 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 2015/10/25 15:1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11/19 20:2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유리스 2015/10/25 20:19 # 삭제 답글

    항상 마음을 움직이는 글, 감사합니다.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서준식 옥중서한] 중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무언가를 관찰 할 여유 조차 없다고 하면 핑계 일까요.
    대상에 대한 관찰 자체가 일상적인 숭고한 의무이고 교육이어야 할 텐데 말이죠.
    기사도, 좋은 글도, 배려도 그렇게 출발하는 듯 합니다.
  • deulpul 2015/11/19 20:30 #

    관찰이라는 말씀, 마음에 깊이 와 닿습니다. 관찰하고 그 결과를 보이는 일, 세상의 밝음뿐 아니라 어두움까지 그대로 펼쳐 보이는 일이, 우리 사회가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해 인식하고 긍정하고 공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는 출발점이 될 수 있겠지요.
  • Gatsby 2015/10/26 18:44 # 삭제 답글

    우리는 이해심이 넘치는 동시에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사안에 대해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에 강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준비된 우리는 그저 작은 실마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들풀님의 실마리와 같은 글 감사합니다.

    더 나아가, 이해보다 배려가 앞서는 사회를 꿈꿔봅니다.
  • deulpul 2015/11/19 20:36 #

    이곳에도 종종 씁니다만, 우리 사회가 조금 여유로와진 것인지, 분명히 나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그 폭이나 깊이가 넓고 깊지 못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만, 배려의 실마리를 언제든 풀어낼 준비를 갖춘 분들이 점점 많아지는 일은 분명 건강한 변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신, 넘치거나 부족한 이해심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까, 더 나아가 작은 사례에서 갖게 된 각성을 어떻게 구조적인 변화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점은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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