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척하고 추한 고통 섞일雜 끓일湯 (Others)

요절한 일본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中島敦)에 의해 파악된 인간 사마천(司馬遷)의 한 대목이다.


(사마천)는 늘 인간에게는 각각 어울리는 사건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확신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사실(史實)을 취급하면서 자연히 길러진 생각이었다. 같은 역경이라 해도 비분강개하는 사대부에게는 격렬하면서도 가혹한 고통이, 연약한 무리에게는 완강하면서도 질척하고 추한 고통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설령 그것이 처음에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듯해도, 적어도 그 후의 대처 방법에 의해 운명이 그 인간에게 어울리게 된다고 말이다. ('이능', 명진숙 옮김)


'고통 결정론'이라고나 할 이런 생각은 사마천이 궁형(宮刑)을 당한 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를 괴롭힌 것으로 되어 있다. (사마천은 흉노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사로잡힌 이능(李陵)을 변호하다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가 제거되는 궁형을 당했다.) 소설 속 사마천은 목이 베이거나 온몸이 찢겨나가는 사형을 받지 않고 수치스러운 궁형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당시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는 수치를 겪고도 자결함으로써 명예를 지키지 않은 것은, 부친이 당부한 역사서 완성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원인이야 어쨌든, 사마천의 궁형은 사대부에게 마땅한 격렬하고 가혹한 고통이 아니라 연약한 무리에게나 어울릴 질척하면서도 추한 고통이었던 셈이다. 자신의 믿음과는 달리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 일어난 것, 그리고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 때문에 그러한 사건을 긍정하여야 하는 현실이 사마천에게 분노와 고통의 굴레를 덧씌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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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로지 우연으로 갖게 된 남성됨을 자랑스러움의 근거 같은 것으로 삼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앉아서 오줌을 누는 방식의 명백한 실용적 이득에도 불구하고 '서서 쏴'를 남자의 자부심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그러하며(이들 대부분은 화장실 청소를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들의 자부심은 타인의 수고와 노동에 기생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진짜 사나이' 같은 텔레비전 쇼의 명명(命名) 발상 역시 그러하다.

지금도 이런 지경이니, 남성이 아니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고대 중국에서 남성성의 최고 존엄인 돌출 생식기를 삭탈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 될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몸이 불편하기로 따지자면, 이것은 다른 형벌에 비해 훨씬 가볍다. 얼굴에 불인두로 낙인이 찍히거나 코를 베이는 것에 비하면, 그 형벌의 잔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궁형이 사형에 버금가는 중형으로 간주된 것은, 이 형벌의 뒤에 수반되는 내적 수치심과 외적 모멸감이 당시 사대부 남성에게는 죽음에 버금가게 괴로운 것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말하자면 궁형은 비록 몸에 손을 대긴 하지만 신체형 형벌이라기보다 감정형, 명예형 형벌이었던 셈이다.

사마천은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문왕은 갇힌 몸이 되어 <주역>을 연역하였고 중이(仲尼)는 곤란한 처지를 당하여 <춘추>를 지었습니다. 굴원(屈原)은 쫓겨가서 <이소>를 섰고, 좌구(左丘)는 실명한 뒤에 <국어>를 지었습니다. 손자(孫子)는 발이 잘리고 <병법>을 편찬하였고 여불위(呂不韋)는 촉(蜀) 에 유배되어 세상에 <세난> <고분>을 저술하였으며 <시경>의 300편 시는 대개 성현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가슴 속에 맺힌 바가 있어 그 하고자 하는 바를 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줄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좌구와 같이 눈이 없고 손자와 같이 발이 잘린 사람은 끝끝내 세상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물러나 서책(書冊)을 써서 자신의 분한 생각을 펴고 이론적인 문장을 세상에 남겨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저도 감히 겸손치 못하게도 무능한 문장에 스스로를 맡기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천하의 산실(散失)된 구문(舊聞)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흥망(成敗興亡)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하였습니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고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이나 주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대략 사정이 이러하므로, 자신이 배운 바에 따라 입바른 소리를 하여 통치자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사마천이 '격렬하면서도 가혹한 고통'을 겪지 않고 '질척하고 추한 고통'을 겪게 된 것, 혹은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후대인이 <사기>를 갖게 된 것은 오로지 그가 수치스러움을 감당한 덕분이기 때문이다.

고통 결정론에 따르면 고통은 커도 괴롭고 작아도 괴로울 듯하다. 크면 그 고통 때문에 괴롭겠지만, 작으면 나의 그릇이 그것밖에 되지 않은가 하는 자괴감이 사람을 할퀼 것 같다. 경세제민의 뜻을 품었던 동서고금의 성인들은 모두 이 세상의 거대한 고통들을 스스로 짊어지고 나섰고, 부패하고 간사한 정치 모리배들조차 인민의 고통을 입에 달고 살지 않는가.

추한 고통을 감당하며 질척질척 수치스럽게 살 것인가, 아니면 격렬하고 가혹하게 죽을 것인가.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서의 집필 같은 거대한 소명쯤 있어야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일지 모르겠다.

국정 역사서 따위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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