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보라매공원에도 ‘반려견 놀이터’
서울 보라매공원에 개 놀이터가 생긴다는 소식이다. 개한테도, 개를 가진 사람한테도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는 개가 사라졌다. 네 단락으로 된 본문에 '개'란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개 대신 쓰인 말은 반려견, 애견, 소형견, 중-대형견, 강아지 등이다. 개 기사에 개란 말을 쓰지 않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개와 반려견의 차이는 무엇일까. 반려견은 개의 부분집합인가? 반려견이 아닌 개는 무엇인가? 식용 개인가?
식용 개를 집에서 키우는 사람이 있다 치더라도 그런 사람이 보라매공원에 개를 놀리러 나오지는 않을 듯하다. 말하자면 반려견이란 말은 이 기사에서는 개와 구별되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말이 그저 타성적으로 들어간 것인가? 그랬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하지만 기사(혹은 보도자료)는 의식적으로 개라는 말을 피하고 대신 반려견이란 말을 쓰려고 한 것 같다. 이것은 우리말 쓰기의 측면뿐 아니라 그 뒤에 깔린 의식 측면에서도 문제다.
반려견이라는 말은 개가 사람과 동고동락하는 식구 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주로 개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쓰고 싶어한다.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별다른 필요 없이 개를 대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게다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개가 나쁜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개는 정확하고 과학적이며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단어다. 욕설의 단골 요소로 들어가긴 하지만, 그건 사람이 그렇게 나쁘게 쓰는 것뿐이다. 개는 그냥 개다. 개를 개새끼로 보든 개님이나 반려견으로 보든, 그것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 개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말은 개다.
참고로 미국에 있는 개 놀이터들의 이름도 대부분 'dog park'다. 좋다고 소문난 데들도 그런 이름이다. 일본은 '도그 런(ドッグラン, dog run)'이라고 한다. 어디나 '개'를 대신하는 거창하고 화려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공의 언어로 쓰여야 할 자리에 개 대신 반려견을 고집하는 모양은, 내용보다 겉치레, 실(實)보다 명(名)에 집착하는 우리 풍토의 단면을 보여준다.
개 이야기 나왔으니 여담 한 마디.
우리 집 앞에는 하천이 흐르고, 그 가장자리로는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는 길이 있다. 거기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주 많다.
산책로로 내려가는 길 입구마다에는 '애완동물 동행 자제'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자제'라는 것은 공공성의 측면에서 볼 때 아주 모호하고 무기력한 말이다. 금지는 아니지만 되도록 하지 말라는 뜻인데, 따라서 이것은 처벌보다 양심이나 양식에 호소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나의 필요에 따라 양심이나 양식이 없기로 작정하면 아무런 집행력을 갖지 못하는 사어(死語)가 되는 셈이다.
우리 집 앞에 흐르는 개천 가에서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작정한 사람들이 흔하다.
나는 남들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일을 못마땅해 하지 않는다.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전제 아래에서 그렇다.
개를 데리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세상 천지를 개 화장실로 생각하여, 오줌은 그렇다치고 똥을 누이고도 그냥 가버리는 것이다. 그런 장면을 보면, 나는 그들이 데리고 다니는 것은 개요 그 개를 끌고 다니는 것은 개새끼라고 생각한다. 개는 길에서 똥을 누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생각을 해 마땅할 동물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개보다 못한 존재라고 할 밖에.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산책로를 다닐 때마다 개똥을 피하느라 고심하거나, 새벽 출근길에(이 산책로를 조금 거쳐야 전철역에 이른다) 개똥이라도 밟게 되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 물론 나도 서울에서 개 키우며 살아봤고 개 데리고 다녀도 봤다.
몸이나 마음이 불편한 사람을 '장애우'라고 부르는 움직임이 한때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마치 장애를 가진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보거나 들을 때마다 불편했다.
장애우는 장애에 벗이란 뜻의 한자 우(友)를 붙인 말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을 존중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조어겠지만, 억지스럽기 짝이 없다. 마치 낯선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임에서 사회자가 억지로 옆사람과 인사하고 포옹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떤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갑자기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서도 벗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게고 벗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게다. 비장애인과 똑같다. 그런데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친구로 부르며 동무 대접을 해줘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또다른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쓴다고 해서 보통 사람의 편견이나 무신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말의 성찬, 말의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가장 널리, 그리고 공식적으로 쓰이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말은 '장애인'이다. 언론 기사나 공문서에서도 그렇게 쓰도록 하고 있다.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개 놀이터가 생긴다는 소식이다. 개한테도, 개를 가진 사람한테도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는 개가 사라졌다. 네 단락으로 된 본문에 '개'란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개 대신 쓰인 말은 반려견, 애견, 소형견, 중-대형견, 강아지 등이다. 개 기사에 개란 말을 쓰지 않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개와 반려견의 차이는 무엇일까. 반려견은 개의 부분집합인가? 반려견이 아닌 개는 무엇인가? 식용 개인가?
식용 개를 집에서 키우는 사람이 있다 치더라도 그런 사람이 보라매공원에 개를 놀리러 나오지는 않을 듯하다. 말하자면 반려견이란 말은 이 기사에서는 개와 구별되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말이 그저 타성적으로 들어간 것인가? 그랬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하지만 기사(혹은 보도자료)는 의식적으로 개라는 말을 피하고 대신 반려견이란 말을 쓰려고 한 것 같다. 이것은 우리말 쓰기의 측면뿐 아니라 그 뒤에 깔린 의식 측면에서도 문제다.
반려견이라는 말은 개가 사람과 동고동락하는 식구 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주로 개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쓰고 싶어한다.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별다른 필요 없이 개를 대치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게다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개가 나쁜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개는 정확하고 과학적이며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단어다. 욕설의 단골 요소로 들어가긴 하지만, 그건 사람이 그렇게 나쁘게 쓰는 것뿐이다. 개는 그냥 개다. 개를 개새끼로 보든 개님이나 반려견으로 보든, 그것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 개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말은 개다.
참고로 미국에 있는 개 놀이터들의 이름도 대부분 'dog park'다. 좋다고 소문난 데들도 그런 이름이다. 일본은 '도그 런(ドッグラン, dog run)'이라고 한다. 어디나 '개'를 대신하는 거창하고 화려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공의 언어로 쓰여야 할 자리에 개 대신 반려견을 고집하는 모양은, 내용보다 겉치레, 실(實)보다 명(名)에 집착하는 우리 풍토의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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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이야기 나왔으니 여담 한 마디.
우리 집 앞에는 하천이 흐르고, 그 가장자리로는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는 길이 있다. 거기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주 많다.
산책로로 내려가는 길 입구마다에는 '애완동물 동행 자제'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자제'라는 것은 공공성의 측면에서 볼 때 아주 모호하고 무기력한 말이다. 금지는 아니지만 되도록 하지 말라는 뜻인데, 따라서 이것은 처벌보다 양심이나 양식에 호소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나의 필요에 따라 양심이나 양식이 없기로 작정하면 아무런 집행력을 갖지 못하는 사어(死語)가 되는 셈이다.
우리 집 앞에 흐르는 개천 가에서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작정한 사람들이 흔하다.
나는 남들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일을 못마땅해 하지 않는다.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전제 아래에서 그렇다.
개를 데리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세상 천지를 개 화장실로 생각하여, 오줌은 그렇다치고 똥을 누이고도 그냥 가버리는 것이다. 그런 장면을 보면, 나는 그들이 데리고 다니는 것은 개요 그 개를 끌고 다니는 것은 개새끼라고 생각한다. 개는 길에서 똥을 누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생각을 해 마땅할 동물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개보다 못한 존재라고 할 밖에.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산책로를 다닐 때마다 개똥을 피하느라 고심하거나, 새벽 출근길에(이 산책로를 조금 거쳐야 전철역에 이른다) 개똥이라도 밟게 되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 물론 나도 서울에서 개 키우며 살아봤고 개 데리고 다녀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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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나 마음이 불편한 사람을 '장애우'라고 부르는 움직임이 한때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마치 장애를 가진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보거나 들을 때마다 불편했다.
장애우는 장애에 벗이란 뜻의 한자 우(友)를 붙인 말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을 존중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조어겠지만, 억지스럽기 짝이 없다. 마치 낯선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임에서 사회자가 억지로 옆사람과 인사하고 포옹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떤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갑자기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서도 벗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게고 벗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게다. 비장애인과 똑같다. 그런데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친구로 부르며 동무 대접을 해줘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또다른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쓴다고 해서 보통 사람의 편견이나 무신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말의 성찬, 말의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가장 널리, 그리고 공식적으로 쓰이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말은 '장애인'이다. 언론 기사나 공문서에서도 그렇게 쓰도록 하고 있다.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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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Admiral 2015/12/11 07:41 # 삭제 답글
개인적으로 전 반려견 이란 단어 싫더군요. 반려라는 단어에서 서로 사랑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즉 부부간, 연인간)가 생각나다보니 "개하고 결혼했냐?" "수간이냐?"이란 생각이 먼저 들어요. 가족이라면서 개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고자 만든다거나 성대수술시키기도 하면서. (...)
deulpul 2015/12/11 14:06 #
NorthShore 2015/12/15 03:34 # 삭제 답글
deulpul 2015/12/16 23:22 #
팅커벨 2016/03/30 14:40 # 삭제 답글
deulpul 2016/03/30 15: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