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독청(我獨清) 대 굴니양파(淈泥揚波) 섞일雜 끓일湯 (Others)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의 과학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셨다.

두 사람 앞에 똑같이 미지근한 물을 담은 두 세숫대야가 있다. 한 사람(A)의 손은 매우 차다. 다른 사람(B)의 손은 매우 따뜻하다. 이제 두 사람이 물에 손을 담그면 각각 어떻게 느끼겠느냐.

나는 두 물의 온도가 같으니까 당연히 두사람은 똑같이 미지근하게 느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니라시는 것이다.

물은 같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르게 느낀다. 그럼 누가 차갑고 누가 따뜻하게 느끼겠느냐.

나는 좀 머뭇거리다가, 이번에도 당연히 손이 따뜻한 사람이 물을 따뜻하게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큰 수 + a) > (작은 수 + a) 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번에도 아니라시는 것이다. 손이 찬 사람이 물을 따뜻하게, 손이 따뜻한 사람이 물을 차갑게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간단한 실험을 하여 보았다면 금방 알 수 있었을 일이다. 내가 손을 물에 번갈아 넣어보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깨달았다면, 그것은 내게는 아르키메데스 못지 않는 'Aha moment'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땐 책에 나오는 내용을 모두 실험하여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나는 자연과학자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 뒤 나는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대비 효과 이론을 자연스럽게 검증하게 됐지만 말이다.


--- ** --- ** ---


다음은 눈의 착각 현상을 보이기 위해 흔히 제시되는 그림 중 하나다.

이런 그림은 보통 가운데 상자의 색이 같고 주변 색이 다르다. 그래야 효과가 더 극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주변 색이 같도록 그려보았다. 위의 미지근한 물 실험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도 여전히 대비로 인한 착시 효과가 발생한다. 두 바깥 상자는 정확히 같은 회색인데, 가운데 상자의 밝기에 따라 그 명도가 달라 보인다.

바깥 상자가 어떤 조직이나 모임이라고 생각해 보자. 가운데 상자는 개인이다. 바깥 상자는 적당한 정도로 때가 묻어 있다. 새카맣게 더럽지도 않고 순백처럼 희지도 않다. 그저 적당하게, 큰 문제없이 타성적이고 관행적인 정도만큼만 때가 묻었다.

여기에 흰색 상자가 끼어들었다. 주변 상자는 갑자기 더러운 존재가 되는 것 같다. 반대로 검은 상자가 끼어들었다. 주변 상자는 갑자기 깨끗하고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 것 같다. 검은 상자 바로 옆은 희뿌연 광채까지 은근하게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소개팅 갈 때 못생긴 친구를

바깥 상자 쪽에서 볼 때, 자신을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시키는 흰색 상자는 반갑지 않다.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지금까지 당연한 듯 해왔던 적절한 요령들이 흰색 상자 덕분에 갑자기 부정한 짓이 되어 버린다. 세상 물정 모르는 흰색 상자 때문에 우리가 돌연 나쁜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는가.

이것은 흰색 상자에게도 곤란한 상황이다. 조직이나 모임은 그 말 자체가 의미하듯 혼자서 굴릴 수 없다. 어떻게든 주변의 상자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바람직하기로는 1) 바깥 상자의 색이 흰색에 가까워지면서 안쪽 상자와 동화되는 것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것은 여럿의 불이익과 불편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흰색 상자는 2) 믿는 바를 버리지 않다가 꼴통으로 찍혀 왕따를 당하거나, 아니면 3) 적당히 회색으로 변질하며 주변과 섞이게 된다. 대개의 사회는 3)번형 인간을 바라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2)번형이 되면 서로가 피곤하고, 3)번형이 되면 서로가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적절한 조직 이데올로기로 합리화되어, 그런 변화를 겪는 사람의 상처 입은 양심을 매만져준다. 융화, 적응, 친화력, 경륜, 수완 따위 말들이 그것이다.


--- ** --- ** ---


그러나 우리는 종종 2)번형 사람을 보기도 한다. <송곳>의 주인공 이수인 과장은 그런 사람일 게다. 그는 부대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원칙과 매뉴얼을 고수하며 손해 보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이 도와주려는 이들로부터도 배척당하는 외롭고 고달픈 사람이다.

그렇지, 우리는 종종 2)번형 사람을 보기도 한다. 불행한 것은, 그런 사람은 주로 픽션의 세계에서 만나진다는 것이다. (<송곳> 주인공들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극화된 인물이다. 또 나는 좀더 보편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다.) 픽션의 세상에서는 닳고닳은 수완가와 요령 없는 원칙주의자가 비슷한 양과 비중으로 나온다. 그래야 픽션의 구조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픽션에서는 선(善)의 주인공(protagonist)과 악의 주인공(antagonist)이 모두 필요하다.

가상 인물 이수인은 극이 끝날 때까지 회색으로 변질되지 않는다. 그가 인사상무 정도의 나이가 되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른다. 픽션은 그가 회색에 동화되지 않고도 끝내 세속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으로 묘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라면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 --- ** ---


굴원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를 시기하는 모리배의 모함 때문에 밀려나자 '어부사(漁父辭)'를 썼다. 작품 안에서 굴원은 어부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굴원이 말하기를 "세상이 모두 혼탁하되 나홀로 맑았으며 모든 이가 다 취해있되 나 홀로 깨었더니 이 꼴을 당하게 되었소." 어부가 말하기를 "현명한 이는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과 함께 흘러가는 법이니, 세상이 모두 혼탁하다면 왜 그 세상에서 진흙탕을 뒤집어쓰지 않으며, 모두가 취해 있다면 왜 그 술지게미를 떡고물로 삼아 배를 불리고 술을 함께 퍼마시지 않는단 말이오? 왜 깊이 생각하며 고상함을 추구하여 스스로 쫓겨남을 자초한단 말이오?"

屈原曰 擧世皆濁我獨清 衆人皆醉我獨醒 是以見放 漁父曰 聖人 不凝滯於物而能與世推移 世人皆濁 何不淈其泥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歠其醨 何故深思高擧 自令放爲


거세개탁 아독청 - 남들은 다 더럽고 나만 깨끗하다니, 말만 들어도 밥맛이 떨어지려고 한다. 굴원은 정말 재수없는 인간 같다. 그가 준 것도 없이 미워 보이는 것은, 그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결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그의 말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아독청(我獨清)의 세계관과 굴니양파(淈泥揚波)의 처세관 대립은 수천 년 전에도 지금과 같았고, 또 수천 년 뒤에도 마찬가지일 듯싶다. 인간에게 욕심과 양심이 동시에 존재하는 한, 이러한 구도는 언제나 인간 사회 구석구석을 떠돌 것이다. 그나마 한 사회가 취해야 할 기풍이 양자에 대한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면, 다수결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굴니양파로 챙기는 현실의 이익과 아독청으로 챙기는 양심의 재화를 저울에 달아 본다면 어느 쪽이 더 무거울지 모르겠다. 그것은 각자 어떤 저울을 갖고 있냐에 따라 달라질 뿐, 객관적으로 수량화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리라. 현실에서 우리는, 몸은 어디로 갈지언정 마음으로는 아독청을 염원하면서, 이수인 같은 이를 응원하면서, 순백한 나를 그렇게 살도록 놔두지 않는 세상을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우리의 존재가 바로 그와 같은 세상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Advertisement


 

덧글

  • 99 2015/12/14 18:34 # 삭제 답글

    중간에 2)와 3)이어야할 것이 둘 다 2)로 나와 잠깐 혼동했네요. 오타인 듯합니다.
  • deulpul 2015/12/14 20:40 #

    잇힝- 숫자 정리가 안 되었군요.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트위터에서 잡아주신 에카 @Eka_3mori 님께도 감사드려요.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