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더하면 근심만 커지리 섞일雜 끓일湯 (Others)

앞글에서 함께 읽은 움베르토 에코의 <Numero Zero> 제1장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독학하는 사람이 그렇듯, 패배자는 언제나 승리자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승리자가 되고 싶다면 오로지 한 가지 일만 파고 그 외의 것에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박학다식의 즐거움은 패배자로 가는 지름길이다. 어떤 사람이 더 많이 알수록, 사정은 더욱 나빠지게 마련이다.


동의하십니까?

소설의 화자는 스스로를 패배자라는 개념과 연결시키는데, 자신의 과거를 약술한 데 따르면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맥락 때문이다.

1. 2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던 안나가 화자를 그렇게 규정했다. 본인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는 모양새다.

2. 공부를 중단하고 나서도 언젠가 졸업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불가능한 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패배자다"라고 한다. 화자가 졸업을 깨끗이 포기함으로써 패배자가 되지 않았는지, 계속 졸업을 염원하며 패배자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뒤의 문맥으로 봐서는 전자인 듯하고 따라서 아직도 화자는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는 듯하다.

3. 그리고 위의 인용문, 즉 많이 알수록 패배자가 된다는 대목이 나온다. 백과사전 편집 일을 하던 때를 회상하는 대목인데,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같은 말을 떠올리면, 화자는 이제 패배자임을 (어떤 의미에서는 자랑스럽게) 인정하는 듯하다.

4. 마지막으로 '언젠가 훌륭한 책을 써서 대박을 치리라'는 꿈을 패배자의 것으로 간주하고 그 자신이 그런 꿈을 가졌다고 고백한다. 이제 빼도박도 못하는 패배자다. 적어도 그가 글쓰기를 포기하기 전까지는 그렇다.

이러한 네 개의 '패배자의 맥락'과 관련해, 읽는 이는 화자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네 번째 맥락에서 화자가 결국 글쓰기를 포기하고 책을 써 대박을 치리라는 꿈을 포기하였을 때, 그가 패배자의 수렁에서 탈출한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패배자의 수렁으로 들어간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다분히 코믹한 필체로 서술된 세 번째 맥락이다. 1) 많이 알고 관심이 다양한 사람은 (화자의 견해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므로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이야기 같고, 2) 출세나 성공의 시각으로 보지 않더라도, 많이 알면 삶이 피곤하거나 슬퍼지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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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영화 <르네상스 맨>의 한 장면이다. (예전에 <슬로우뉴스> 편집위원들이 각자 좋아하는 영화를 하나씩만 말하기로 했을 때, 나는 이 영화를 꼽았다.) 지금 흑인 병사가 선생님에게 말하고 있는 대사는 "지식이 늘어나면 슬픔도 늘어난다"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대사가 나온 맥락은 이렇다. 똑똑하긴 하지만 천성이 게을러 패배자로 추락한 광고맨 빌 레이고(대니 드비토)는 실업수당을 받다가,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여 육군 신병훈련소 강사가 된다. 그가 가르칠 대상은 신병 중에서 바보들로 찍힌 고문관 8명이다. 말하자면 훈련소 패배자다. 직장 패배자가 고등학교를 어떻게 졸업했을까 싶은 훈련소 패배자들을 상대로 하여, 어찌어찌 하다보니 어이없게도 <햄릿>을 가르친다. 이들이 원래부터 바보가 아니라 교육 받고 지적 자극을 받을 기회가 없어서 바보가 되었음을 조금씩 깨달아 갈 때,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똑똑한 한 바보를 주목하게 된다. 빌이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자, 그 바보가 저와 같이 말한다. 셰익스피어를 달달 외우는 선생님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 명문장이 바보 입에서 나온다.

"지식이 늘어나면 슬픔도 늘어납니다."

이것은 성경 구절이다. <구약성서>의 전도서(가톨릭에서는 코헬렛) 제1장 18절의 뒷부분인데, 전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개역개정 구약성서 전도서 1:18)
  • 지혜가 많으면 걱정도 많고 지식을 늘리면 근심도 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구약성경 코헬렛 1:18)
  • 어차피 지혜가 많으면 괴로운 일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아지는 법이다. (공동번역 구약성서 전도서 1:18)


코미디인 이 영화로부터 굳이 의미 있는 주제를 추출해내자면 교육, 즉 지식이나 지혜를 전수하고 늘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부터 '르네상스 맨', 많이 알고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이러한 아이디어와 갈등하는 상대는 무지, 억압, 도피 등이다. 얼핏 보기에 무지, 억압, 도피가 정해진 길을 쉽고 편안하게 가도록 만들어주는 것 같다. 지식을 더하면 근심이나 슬픔만이 늘어나게 되는 것 같다. 적어도 저 신병이 연루되는 일은 그렇다.

물론 영화는 영화이므로 해피엔딩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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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시습지 불역열호이고 배움의 희열이란 양주동의 수필에서도 심훈의 소설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늘 세속적 승리자의 인생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 것 같다. <Numero Zero>의 주인공 견해처럼 많이 앎이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알고 깨달을수록 자신이 미약하고 세상이 괴로운 곳임을 인식하게 된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지식을 늘리는 일은 세속적 성공과 내밀한 행복을 모두 배반하는 경로인 셈이다.

전도서 위 문구에 대한 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지혜가 많으면 괴로움, 혹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족이 커진다. 지식을 늘리면 근심이 늘어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지식을 늘리는 자는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의 정신을 소비하고 삶을 단축시켜 가며, 몸과 마음 모두에서 고단하고 힘든 노동을 수행하여야 한다.

△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지식으로부터 기만당할 수 있으니, 거짓을 참으로 오인하기도 하고 다양한 의심으로 혼란을 겪기도 하는데, 무지한 자는 이러한 일로부터 원천적으로 안전하다.

△ 많이 알게 되면 자신의 무지, 허약함, 장애 등을 명징하게 깨닫게 된다.

△ 게다가 이러한 장애들을 막거나 극복하는데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헛되고 비효율적인가를 알게 된다.

△ 자신의 지식이 아주 불완전하고 만족스럽지 않음을 알면 오히려 더욱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게 된다.

△ 그렇게 어렵사리 쌓아온 지식이라도 자신의 죽음과 함께 일거에 소멸되며, 그러한 지식으로 인하여 안락하게 된 바는 거의 없고, 오히려 가장 비열하고 무지한 인간보다 못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적 호기심에 순응하는 것은 결코 편안하고 풍요로운 직업이나 취미가 아닌 듯하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다. 이것은 개인과 인류의 거대한 모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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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anna 2016/03/03 22:50 # 삭제 답글

    패배자의 정의. (결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뭔가 뜨끔하고 아프네요. 불가능한 일에 대한 희망까지도 아니지만 미련 같은 것, 여전히 버리지 못한 패배자로서요 ^^
  • deulpul 2016/03/15 11:30 #

    말하자면 우리는 누구나 패배자로 죽는 것이겠지요. 굳이 패배지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그건 꿈이 있는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marquez 2016/03/04 09:19 # 삭제 답글

    얼마전 직장 교양강좌에 한 여행작가가 방문해 환갑의 엄마와 떠난 세계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평생 분식점을 하며 세상 밖을 모르셨다는 엄마가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며 평생처음 "내일이 기다려진다"고 하셨답니다. 내가 이 다음에 아들과 여행을 떠나면 저만치 설레고 즐거울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죠. 그렇지않을거 같더라고요. 그러기엔 제가 세상에 대해 쓸데있는지 없는지 모를 것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 의지는 커녕 아들에게 전적으로 주도할 기회도 주지못할 것 같더라고요. 인격을 수양하지 않는 한, 아는게 많다는 것은 편리보다 불만과 불편을 더 자주 지각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인격 수양은 또 얼마나 높은 산이랍니까.
  • deulpul 2016/03/15 11:46 #

    아, 그런 생각까지는 해 보지 못했는데, 중요한 말씀이시네요. 많이 아는 사람들은 주로 가르치려고 하고, 그래서 상대방(다른 세대)의 창의를 방해하는 결과도 흔히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해외 여행을 가서 이 성당은 어떤 유래가 있고 저 광장은 어떤 역사가 있고... 시종일관 말한다면 동반자가 마음으로 느낄 중요한 기회를 빼앗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지식의 증식과 더불어 지혜도 함께 커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 팬입니더 2016/03/06 14:38 # 삭제 답글

    님 글 넘 좋아요 진짜
  • deulpul 2016/03/15 11:48 #

    [주인장]이/가 [이 댓글]을/를 [추천O 신고X] 하였습니다.
  • G 2016/03/28 13:41 # 삭제 답글

    저희 직장에서는 매주 직무교육을 합니다. 외부강사를 불러다 하거나 하는 거창한 종류의 것은 아니고, 직무에 관련한 도서를 다같이 읽고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에 대한 반응은 주로 불평 불만 입니다. '책의 이상과 현실은 맞지 않다.', '우리의 현실은 가혹하기에 책의 이상을 이룰 수 없다.' 등 지식은 우리 직원들을 괴롭힙니다.
    일부 직원은 불만이 적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유익한것만 취하면 불만이 없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천의 영역은 조금 다른 듯 합니다. 교육의 불만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실천하는 직원과 그렇지 않은 직원이 섞여 있죠. 실익을 따져보진 않았지만 훑어보기에 실천하는, 혹은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직원이 더 멋져 보입니다.

    지식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슬픔은 분명 긍정적이지 못하죠. 하지만 슬픔 이후의 무언가(실천 이라던지)가 곁들여 진다면, 우리는 슬픔보다 조금 나은것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deulpul 2016/03/30 15:32 #

    그런 점에서도 사실 알면 괴로운 경우가 많죠. 앎에서 윤리적 부담이 생기게 되니까요. 그런 부담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라 해도, 아예 부담이 생기지 않는 것보다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뭔가 순환논법 같기는 하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서성대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 아닌가도 싶은데, 조금 더 생각을 하여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좋은 교육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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