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명의의 핸드폰이 없는 한국인처럼 섞일雜 끓일湯 (Others)

'나는 본인 명의의 핸드폰이 없는 한국인처럼 울었다'는 말이 있다. 너무도 슬퍼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을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본인 명의의 핸드폰이 없어서 실제로 울었다.

작년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주민등록증도 운전면허증도 없었다. 아주 오래 된 주민등록증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고, 1종보통 운전면허증은 적성검사 기한을 넘겨서 취소되었다. 술집에 들어갈 때처럼 신분을 증명해야 할 때는 여권을 썼다.

면허증은 시험을 다시 보고 새로 받았다. 다행히 재취득 때 실기시험을 면제하는 5년 기한이 아슬아슬하게 남은 덕분에 필기시험만 봤다. 주민등록증도 주민센터에 가서 새로 받았다. 경찰서에 지문 기록이 없다고 해서 지문도 찍었다. 그렇게 하는 건 외국인 노동자밖에 없는 것 같았다.

시립도서관을 이용하려고 했더니 회원 가입을 해야 한단다. 다행히 웹사이트에서 가입을 할 수 있다. 공공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국민, 즉 주인이 왜 그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또다시 '회원'이 되어야 하는지는 묻지 않기로 하자. 웹으로 할 수 있다는 게 어디냐.

......는 그냥 하나마나 한 것이고,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도서관에 가서 다시 등록하고 회원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그럼 왜

어쨌든 웹사이트 회원 가입부터 시도했다. 가입하려면 이름, 주소, 그리고 공포의 휴대폰 번호를 반드시 입력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휴대폰이 없었고, 앞으로도 되도록 없이 살아볼 생각이었다.

누구나 꿈은 크지 않은가.

그래서 이름에 '홍길동', 휴대폰 번호에 '010-1234-5678'을 넣었다. 오오, 가입이 된다. 나는 훌륭하게 시립도서관의 익명 회원이 되었다.

온라인으로만이라는 것은 함정.

며칠 뒤 도서관에 가서 회원증 만들기를 시도했다. 이 때까지 나는 아무런 범의(犯意)도 악감정도 없었다. 그저 익명으로, 또 휴대폰이 없는 상태로 도서관을 이용하고 싶다는 백설공주 같은 마음가짐만 가졌을 뿐이다.

회원증을 만드는 창구에 있는 아저씨와의 대화.


아저씨: 온라인 가입은 했어요?

나: 네, 물론입니다.

(내가 제출한 아이디 등을 확인해보는 모양)

아저씨: 아니, 이게 뭐에요?

나: 네?

아저씨: 이게 진짜 이름이에요? 홍길동?

나: 아... 그게...

아저씨: 아니, 이건 뭐야! 번호가 1234 5678? 이거 맞아요?

나: 아, 휴대폰이 없는데 넣으라고 해서요.

아저씨: 이 사람이 지금 장난하나... 휴대폰 없는 사람이 어딨다구.


정확히 저렇게 말했다. 휴대폰 없는 사람이 어딨다구. 휴대폰 없는 고양이는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본인 명의의 핸드폰이 없는 한국인처럼 울부짖으며 울었다. 아니지, 본인 명의의 핸드폰이 없는 한국인으로서 짐승처럼 울었다.

이 날 나는 어쨌든 회원증을 만들긴 했다. 본인 명의 핸드폰이 없는 한국인에게는 긴급한 대안이 있기 때문이다.


아저씨: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다가) 가족 없어요!?

나: 가족... 있는데요.

아저씨: 가족 전화번호라도 대봐요!


이후로 내가 빌린 책의 반납 기일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계속 책 반납을 하라는 문자를 받게 되셨다는 슬픈 이야기......

나로서도 남이 오해할 수 있는 책, 이를테면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 마루아먀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같은 책을 빌리는 일을 주저하게 되었다는 더 슬픈 이야기......


--- ** --- ** ---


참고로, 내가 살던 미국 도시에서도 시립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면 도서 대출증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개인 전화번호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휴대전화 번호만 요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휴대폰 안 가진 사람들을 차별하고 공공 서비스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 수가 많은지 적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또 이름도 상관없다. 홍길동으로 하든 로빈 훗으로 하든, 그것도 이용자 몫이다. 기억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실명 인증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래 [덧붙임]을 참조하십시오.)

그래도 공공 도서관 시스템이 붕괴하기는커녕, 세계적 모범이 되며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서 개나 소나 걸핏하면 요구하는 실명 인증을 외국은 하지 않고도 공공 서비스를 잘 운영한다는 점. 이것은 한국 관공서가 오로지 자기네 편의를 위해 국민에게 개인 정보 제출을 강제한다는 한 뚜렷한 증거일 것이다.


[덧붙임] 5월20일 9:15

내가 살던 곳에 살던 분이(헐), 해당 도서관에서도 대출 카드를 만들 때 실명 인증을 한다고 알려주셨다. 지금 찾아보니 신분증과 집 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증명을 제출해야 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제도가 바뀐 모양이다. 어쨌든 전화번호를 필수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정리하면 1) 미국 (해당) 도서관에서도 실명 인증을 한다. 2) 본인 명의의 핸드폰은 여전히 없어도 된다......


--- ** --- ** ---


'나는 본인 명의의 핸드폰이 없는 한국인처럼 울었다.'

물론 이건 농담이다. 본인은 울었다는데, 그 글을 보는(혹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웃게 된다. 하지만 웃어도 상콤하지 않고 뒷맛이 쓰리다.

내가 이 우스개를 안 것은 아주 최근이다.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임정욱 센터장의 다음과 같은 페이스북 포스팅 때문이다



어쨌든 본인 명의의 핸드폰을 갖게 된 한국인인 나는 지금은 울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울고 싶은 심정이다.



Advertisement


 

덧글

  • 2016/05/20 00:3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6/05/20 09:18 #

    아, 지금 찾아보니 정말 그렇게 되어 있군요! 제가 만들던 때는 아니었는데 제도가 바뀐 모양입니다. 본문에 말씀하신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10여 년 전에 처음부터 그랬던 것을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이 부분은 다른 분께 여쭤보고 확인되면 반영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차누 2016/05/20 01:42 # 삭제 답글

    교묘한 홍보...글이군요 :) 좋은 발표 기대하겠습니다.
  • deulpul 2016/05/20 09:20 #

    그것을 알아채시다니... 는 농담이고요, 각 분야 전문가들이 좋은 말씀을 해 주실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 치니 2016/05/20 08:52 # 답글

    저는 예전에 정독도서관에서 본인 외에 추가로 가족의 번호를 꼭 대야만 회원가입이 가능하다고 해서 왜 가족만 되느냐 친구는 안되냐며 항의를 했더니 (즉 가족 없이 혼자인 사람은 어떡하냐고), 난감해하면서 대출 후 반납을 안하면 친구 전화로 확인하기는 어렵다며 먼 친척이라도 대야 한다는, 도무지 이해불가의 답을 들었습니다.
  • deulpul 2016/05/20 09:22 #

    "이 사람이 지금 장난하나... 가족 없는 사람이 어딨다구!" 시골에 계신 할머니께 문자가 발송됩니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빨리 반납하십시오......
  • sharkman 2016/05/21 20:54 # 답글

    며칠전에 조카 명의로 발급된 학습용 바우처를 쓰기 위해 온라인 서점 가입할 때 제 심정이 딱 그랬습니다. 본인(중학생 조카) 인증 해야 한다 -> 본인 명의 폰이 있냐 -> 없으면 아이핀 -> 아이핀 등록 -> 주민등록 번호 넣어라, 본인 명의 폰이 있냐? -> 없으면 가족 명의 폰을 적어라. 이런 악순환을 한시간 동안 거듭해서 컴퓨터는 걸레가 되고 내 멘탈은 붕괴되고...
  • deulpul 2016/05/23 09:35 #

    세상 일의 순환에는 선순환과 악순환, 그리고 한국인터넷 회원가입순환의 세 가지가 있지요... 고생하셨습니다.
  • 나무아비타불 2016/06/22 13:24 # 삭제 답글

    매우 고생스러우셨을텐데 키득거리면서 잘 읽었습니다. 공공서비스의 설계가 엉성하다 못해 국민들에게 불편을 초래한다는 점은 반박불가입니다만, 왜 저런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생각도 듭니다. 저는 아마 도서반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일거라고 '추측' 하는데요..아무튼 선량한 도서관 이용자들에게 불편을 초래하지 않을, 뭔가 쌈박한 수단을 고안해내면 좋겠어요.
  • deulpul 2016/06/23 19:43 #

    맞습니다. 도서관이 이렇게 개인정보를 캐가고 '보증인'까지 세우도록 하는 것은, 대출된 책이 회수되지 않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모두 착착 잘 반납을 하더라도 회원증 발급 때 습관적으로 개인 인증을 요구할 것 같긴 하지만, 사회의 불신감(과 그 원인 행위들)이 이러한 절차의 정당성을 더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댓글 입력 영역



Adsense

Adsense2

구글 애널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