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게 살 권리는 어디에 섞일雜 끓일湯 (Others)

어떤 교수님 연구실에 갔더니 탁자에 강수돌 교수가 펴낸 책 <여유롭게 살 권리>가 놓여 있었다. 잠깐 들춰 보았는데 마침 이런 대목이 나왔다.


실제로 한국인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일도 오래하고 일 외의 다른 삶을 잘 모른다. 일중독 외에 알코올이나 담배, 게임,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 등의 중독이 널리 퍼진 것도 이와 연관된다. 심지어 여가 생활조차 중독적이다. 짧은 여행을 가도 너무 많은 곳을 다녀오려 하거나, 한 곳에 가더라도 조용히 머물기보다 뭔가 부지런히 다녀야 하고 사진도 많이 찍어야 한다. 산에 가면 반드시 정상을 밟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심지어 주말마다 등산이나 캠핑을 하는 등산 중독, 캠핑 중독도 있다.


한국 사람은 너무 바쁘고 너무 일을 많이 (해야)한다는 내용에서 나온 대목이다. 위 글 중에서도 한국인식 여행을 지적한 부분이 특히 눈에 띄었다.

여행이란 나그네(旅)가 다니는(行)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동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여행하는 내내 이동할 필요는 없다. 가서 머무르는 여행도 여행이다. 그런 점에서 여행이란 말은 몸을 물리적으로 이동한다는 뜻보다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이동한다는 뜻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싶다.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머무르는 여행. 우리가 그런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일단 여행을 떠났다 하면 강수돌 교수의 말대로 조용히 머물기보다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 예전에 외국에서 한국인 여행 가이드가 이끄는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이 가이드는 일행을 무지하게 돌렸다. 자신이 시간을 쪼개가며 예정에 없던 곳까지 돌렸다. 그는 "잠은 한국 가면 얼마든지 잘 수 있지 않은가. 여행 오면 많이 봐야 한다"라고 했는데, 나를 포함한 일행은 그 말이 정말 옳다고 생각했고 그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사했다.

이런 식이다보니 우리의 여행은 새로운 곳에 잠시나마 동화되며 그 공기를 숨쉬고 그 대지를 느끼기보다는, 낯선 이방인으로서 열심히 스쳐지나가기만 하는 모양이 된다. 여행을 다녀오면 카메라는 사진으로 가득 차고 몸은 피곤으로 가득 찬다. 여행으로 휴식을 취한 게 아니라, 여행이란 노동을 하고나면 다시 휴식이 필요한 상태가 된다.

답파(踏破)라는 말이 있다. 밟아서 깨뜨린다는 뜻인데, 유리잔을 밟아 깨뜨린다는 게 아니라 거리를 치달아가서 목적지에 끝내 이르고 만다는 의미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산에 가면 반드시 정상을 밟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는 바로 이 답파의 강박을 말하는 것일 게다. 왜 가는지는 진작에 잊어버리고 가는 것 자체에 매몰된다고 할까. 마치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 나오는 도보고행승, 끊임없이 걸어다니는 것을 고행으로 삼아 도를 닦는 그 중과 같은 모습이리라.


"그러나저러나 말이지, 만약에 말이지, 그것도 수도라고 한다면 말이지, 나는 걷는 것으로, 그 고행으로, 수도하는 중이라고 해야겠습지."


그러나저러나 말이지, 만약에 말이지, 그것도 여행이라고 한다면 말이지, 우리는 뭔가 부지런히 헤매는 것으로, 그 고행으로, 여행하는 객(客)이라고 해야겠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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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래부터 이렇게 바쁘고 거칠게 살아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한 칼럼에 재인용된 독일 선교사 노르베르트 베버의 글(1915년)에서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한국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인은 꿈꾸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연을 응시하며 몇 시간이고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다. 산마루에 진달래꽃 불타는 봄이면 지칠 줄 모르고 진달래꽃을 응시할 줄 안다. ... 그들은 길가에 핀 꽃을 주시하며 꽃과 하나가 된다. 조선인은 모든 것 앞에서 다만 고요할 뿐이다.


모든 것 앞에서 다만 고요하던 우리가 언제부터 모든 것 앞에서 다만 시끄럽고 분주할 뿐으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한 듯하다. 이러한 성정의 변화가 오로지 개인들의 결단으로부터 발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따지고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환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퇴화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속도전 세상에서 몇 시간이고 그윽히 홀로 앉아 있기란 쉽지 않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노인은 풍채가 꽤 좋아 보이지만
요즘 저러고 있다가는 고사(枯死)하기 딱 좋다.


일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되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일에 쏟아붓도록 기대된다. 일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활동이 되고, 거기에 가족이나 꿈 같은 것들조차 종속된다. 이런 삶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실업이 개인과 사회의 고통인 세상에서 일은 갑(甲)이요 사람은 을(乙)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어디나 할 것 없이 현대 사회의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다만 고요할 뿐이던 한국의 변절은 좀 심한 바가 있다. 출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 사람이 가득 차서 발 디딜 틈도 없는데, 밖에 선 사람들은 자신들도 타야 하니까 인간을 짜부라뜨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밀어붙인다. 안에 선 사람들 속에서 불평이 터져 나온다. "밀어도 좀 정도껏 밀어야지..." 나는 종잇장보다 얇아진 상태로 서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나라 중에서 복지는 바닥권이고 노동 시간 많기로 늘 1, 2위를 다투는 한국에 대해 똑같은 말을 하고 싶어진다: "밀어도 좀 정도껏 밀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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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모 아니면 도도 아니고 그냥 꽝이다. 보통의 한국인에게는 적당히 돈을 벌면서 적당히 자신의 여가를 즐기는 삶 같은 것은 잘 주어지지 않는다. 여유롭게 살자면 배가 고파지고, 배를 채우려면 여유가 없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여유롭게 살자면 여유가 없어지고 반대로 여유롭게 살자면 여유가 없어진다. 이렇게 모순적인 삶의 논리에 떠밀려 줄타기하며 살기란, 단 한 번뿐인 인생의 소진 방법으로서는 퍽 불행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유롭게 살 권리를 어디에서 되찾아 올 것인가.

강수돌 교수의 책은, 그 소개 웹페이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그 해결책으로 들고 있다고 한다. (아직 책을 읽지는 않았다.)


첫째, 땅의 경제를 회복해야 한다. 땅은 재산 증식의 수단인 ‘부동산’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토대이다. 땅이 우리 모두의 공동 재산이라는 관점을 회복해야 한다. 둘째,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이뤄내야 한다. 이는 청년 실업 문제에도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 셋째,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돈이 가장 많이 드는 분야, 즉 주거, 교육, 의료 문제를 사회 공동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여기에다 기본소득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주어져야 한다.


너무나 좋은 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3~4가지 당위를 100% 지지한다. (두 번째는 몇 가지 단서를 붙여 조심스럽게.) 다만 이러한 일들은 너무 좋은 것이라서, 그리고 이해당사자들이 견고하게 얽혀있는 문제라서, 내가 살아 생전에 의미 있는 정책들로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 같다. 근현대에 걸친 오랜 현장 투쟁을 통해 하나하나 어렵게 쟁취해왔던 핏빛 노동 권익들이 무기력하고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반납되는 판이라 더욱 그렇다.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기를, 그리고 그런 나의 생각이 정열적인 혁명가가 아니라 무기력한 비평가적 접근의 결과이기를 바라지만, 여하튼 쉽지는 않을 듯하다. 당위가 뚜렷하고 명백할수록 그리로 가는 길이 더욱 멀고 험난해진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여유롭게 살 권리, (우연히 행운을 잡은 소수가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충족될 조짐이 보일 때까지는, 그저 사람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머무르는 여행으로나마 가난하지만 여유로운 삶을 도모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명승지 각처를 기필코 답파하기 위해 불퇴전의 기세로 쇄도하는 군중들 때문에 그런 짓도 결코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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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6/06/08 04:26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6/06/09 08:48 #

    하하, 자학적인 위트는 여전하시군요! 6시45분에 나와 아침 전철 안에서 댓글을 확인한 경기도민으로서 동병상련을 가지려다, 저보다 훨씬 더 격렬한 삶을 사신다는 것을 깨닫고 존경의 마음을 갖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 G 2016/06/20 23:35 # 삭제 답글

    버드런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생각나는 글 입니다.
    게으름은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여유는 것은 긍정적이기에 좋은 느낌이 드는군요.

    강수돌 교수님의 관점 또한 흥미롭습니다. 나누고 함께쓰는 공동체 회복의 관점은 분노로 가득찬 현 사회의 대책으로 적절해 보입니다.
    다만 염려스러운것은, 대략 90년 이후 출생 세대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체험해 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골목에서 함께 뛰어놀고 울타리가 낮았던 시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에게 공동체적 관점을 주지시키는것은 그 자체의 긍정성과는 별개로 굉장히 무리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deulpul 2016/06/23 19:27 #

    최근에 생협 활동을 의욕적으로 진행하시는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말씀하신 것과 같은 문제에 접근하는 방안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느 길이나 쉽지는 않겠지만, 작은 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을 때 약간의 희망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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