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한 것은 중랑천이 아니구요 중매媒 몸體 (Media)

폭우가 쏟아지는 저녁, 약속이 있어 식당에 있는데 카톡이 진저리를 친다. 친구다. 중랑천이 범람했으니 빨리 집에 가라고 한다.

세상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비가 억수처럼 퍼붓더니, 중랑천까지 넘쳤단 말인가. 큰 비가 오면 쉽게 불어나는 하천이긴 하지만, 범람이라니! 그 광대한 하폭(河幅)을 생각하면, 물이 넘쳤을 때 어떤 피해가 벌어질지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 겪은 물난리의 기억이 밀려왔다.

그런데 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 별 시덥잖은 일까지 다 경보문자로 보내오는 이른바 국민안전처가 아무런 말이 없다? 이상하다.

잠깐 찾아보았는데, 서울 동부, 북부에 큰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비가 많이 와서 중랑천 물이 크게 불은 것은 맞지만, 범람했다는 것은 개뻥이다. 물론 나를 걱정해 주는 친구가 뻥을 친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꼴이 벌어졌기 때문에 나에게 그렇게 전해준 것이다.




좌우대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매체가 드물게 일치단결하여 '범람'이라고 썼다. 중랑천이 범람한 게 아니라 무지나 무신경이 범람한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범람(汎濫)은 많아서 넘친다는 뜻이다. 하천의 경우는 물이 불어서 제방을 넘어갈 때 범람이라고 한다. 제방, 즉 둑은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만든 시설물이다. 이 시설물을 넘어설 때 범람이 된다. 뭔가 순환논리

저 기사들이 범람이라고 한 상황은, 중랑천 물이 평소 흐르던 하천폭을 넘어서 그 옆 둔치의 산책로, 운동시설, 동부간선도로 등으로 올라왔다는 말이다. 이것이 범람이 아닌 이유는, 물이 제방을 넘어 중랑천 밖으로 넘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산책로, 운동시설, 도로 등은 중랑천 둔치(= 물 가장자리)를 활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모두 중랑천에 포함된다. 지금처럼 물이 불면 원래 잠기도록 되어 있는 곳이다.

중랑천과 외부를 구분하는 둑은 이러한 시설물 밖에, 하천 권역을 배후의 주택가나 아파트들과 구분하는 경계로 쌓여 있다. '중랑천이 범람했다'는 말은 물이 이 둑을 넘어 주택가로 밀려들어왔다는 뜻이다. 이것은 서울 한복판에서 진도 5.0의 지진이 일어난 것만큼이나 충격적이고 급박한 뉴스이지, '어떻게 집에 가냐 발 동동' 식으로 한가하게 리포팅을 할 뉴스가 아닌 것이다.




위는 청계천 모습이다. 가운데로 평상시 흐르는 물줄기가 있고, 주변에 산책로가 있으며, 그 밖으로 둑 역할을 하는 벽이 있다. 비가 많이 와서 저 수위가 두어 뼘 높아져 물줄기가 산책로를 침범하였다고 하여 '청계천이 범람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청계천이 범람했다는 것은 물이 저 벽을 타고 넘을 정도로 불어났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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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잘못은 왜 벌어졌을까. 중랑천 둔치 시설물들이 거의 언제나 하천의 흐르는 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하천으로부터 독립된 곳으로 생각한 탓일 수도 있다. 혹은 단순히 하천의 범람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사실을 전달하면서도 눈길, 말길을 끌기 위해 최대한 자극적인 표현을 찾는 습성이 드러난 한 사례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다 합쳐진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시 하천관리과에 전화를 해 봤다. 담당자는 이번 비로 중랑천 물이 불어난 것을 놓고 언론이 범람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잘못이며, 시민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으므로 표현을 수정해 달라고 언론사들에 요청했다고 한다.

"빨리 시정해 달라고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그런 표현을 안 쓸 텐데요?"

뒤늦게라도 표현이 고쳐졌다면 다행이지만, 언론의 무지 혹은 호들갑 덕분에 많은 국민은 앞으로 상당 기간 '2016년 여름에 중랑천이 범람했다'는 인식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국민에는 언론 자신도 포함될 것이다. 참으로 희극적인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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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슈3花 2016/07/08 09:32 # 답글

    오! 저도 미처 몰랐던 내용이네요. 용어가 정확히 쓰여야 정말 '범람'했을 때 잘 대처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정말 '범람'했을 땐 어찌 표현할지 궁금합니다.에구..
  • deulpul 2016/08/15 11:27 #

    '범람'이라는 말에 담긴 엄청난 이미지가, 이제는 그런 일을 자주 볼 수 없게 되어 사멸해 버린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남한강이 '범람'하여 양평 읍내 전체가 폭삭 물에 잠겨버린 모양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탓에, 이 말이 참 무섭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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