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어른이들 섞일雜 끓일湯 (Others)

일요일 밤, 프린터 용지가 다 떨어졌다. 문구점들은 다 닫았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는지 편의점에 가볼 생각은 미처 나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대형 마트에 전화해 보니 문 닫기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다.

복사용지를 파는 매대 바로 옆은 운동용품을 파는 매대다. 늦은 시간인데도 손님들이 드물지 않았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온다.

"야, 임마! 그 글러브는 왼손잡이용이잖아! 너 왼손잡이야? 아니잖아. 그걸 뭐하러 껴봐?"

우렁찬 남자 목소리, 말투나 성량에서 취기가 느껴진다. 상대는 아무 말이 없다.

"임마! 그건 포수용이잖아! 너 포수 할거야? 아니잖아! 자식이 아직 그런 것도 모르네."

상대가 드디어 한 마디 한다.

"아이... 다 알아. 그냥 한번 껴 보는 거라구..."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목소리다. 이 목소리에는 섭섭함, 약간의 짜증, 그리고 무엇보다 창피함이 들어있다. 스스로 억누르는 양에서 느낄 수 있다. 목소리에 눈이 달려 있다면, 이 눈은 주변을 서슴서슴 두리번거렸을 것이다.

"얌마, 네 걸 끼라구. 좋은 거 하나 골라. 아빠가 사준다! 하하하핫..."

새 글러브를 사준다니 좋긴 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여럿인 장소에서 큼지막한 소리로 애먼 면박을 주는 데에 아이는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남 신경 안 쓰고 쾌남인 듯 호탕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주변 사람들 신경쓰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의 마음 따위도 신경쓰지 않는다.

"다 알아. 그냥 한번 껴 보는 거라구." -- 이런 심정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것이다. 우린 다 그렇지 않았던가. 아이의 아버지는 안 그랬던 것 같지만 말이다.


그림: Jim Leggitt


종이 뭉치를 뒤적이면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어른의 유치한 수선스러움과 대비되는 아이의 어른스러움이 마음을 울린다. 종종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철이 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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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곤혹스러운 것 중 하나는 생면부지 타인의 공간에 내가 무단히 틈입해 있거나, 혹은 그 역인 상황이 수시로 벌어진다는 점이다.

어느 저녁, 종로에서 버스를 탔다. 바로 앞에 중년과 노년의 중간쯤 되는 아주머니가 앉았다. 나름대로 세련된 차림이다. 휴대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한다.

"아무개니? 아무개야? 왜 전화 안 받았어? 할머니가 계속 했는데..."

손자한테 전화하는 모양이다.

"저녁 먹었어? 뭐하니? 또 게임하니? 밥은 먹고 해?"

여기까지는 그냥 그런 대화. 좀 시끄럽다는 불편함 말고는 달리 주목할 여지는 없다. 그런데...

"아빠는 뭐해? 응? ... 아무개야 너희 아빠, 참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야. 나쁜 사람..."

저 이야기를 열댓 번은 반복했을 것이다. 아마 아주머니는 아이의 외할머니인 모양이다.

아이의 아빠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함께 사는 아빠에 대해 아이의 귀에 대고 저렇게 세뇌를 하는 것은 옆에서 듣기에 끔찍스러웠다. 아이의 아빠가 아무리 나쁜 일을 하고 있더라도,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넋두리를 저렇게 주입하고 있어야 하는 일인가. 아이는 자기 아빠를 어떻게 여기며 살아갈까. 혹은 그렇게 보기를 강요하는 외할머니는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이 가정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아이의 귀에 대고 제 아빠를 혐오하도록 주입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른답지 못한 행동인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를 만들고 키우는 것은 어른들이면서, 그 고민과 고통은 아이들에게 떠넘긴다.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며 살아가는 공간에서 어쩔 수 없이 들리는 소리들이지만, 이렇게 우울하고 마음 무거워지는 소리는 안 듣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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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김승훈 2017/04/20 20:26 # 삭제 답글

    어떤면으로는 부럽기도 해요...
    생면부지의 사람들 앞에서 사적인 얘기를 떠들면서 살 수 있다는 점이...
    그런 무신경함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더라구요...
  • deulpul 2017/04/22 14:14 #

    대중 속에서 익명화되는 일이 편한 점은 분명이 있고, 그런 점에서 말씀하신 심정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컨대 사람이 꽉 찬 만원 지하철 안에서 전화기로 수다 떠는 인간들, 거의 남의 귀에 대고 잡담을 퍼부어대는 그들의 무신경은... 정말 부럽긴 합니다. 그렇게 살면 오래 살긴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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