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되 호구는 되지 말자 섞일雜 끓일湯 (Others)

우리집 가훈은 성실이었다.

아버지가 정했다. 군인이면서도 총보다는 펜을 더 오래 잡았던 아버지는 멋진 필체로 성실, 이라고 써서 독수리로 장식된 액자에 넣어 벽에 걸었다.

아버지는 지독하게 성실했고, 나도 적당히 성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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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정을 가졌을 때, 나는 가훈을 바꾸었다. 내 가훈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었다. 더럽게 싸우는 인간들을 많이 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패거리로 뭉쳐서 이익을 편취하고 획일을 강요하며 그런 획일 속에서 편안해하던 인간들 때문에 정한 것이었다.

나는 화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부동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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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가훈, 아니 집이 없으니 좌우명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걸 정했다.

착하되 호구는 되지 말자.

나는 착한 사람인가? 뿌리부터 착해야 진정 착한 것일 텐데, 실은 그렇지도 않다. 다만 배워온 것이 그렇게 강요하는 데다 시시콜콜 다투며 피곤하게 사느니 혼자 덮어쓰고 모르는 척 사는 쪽이 편해서 좋든싫든 웬만하면 착한 코스프레를 하고 산다.

그런 모양을 보고 오 이 새끼는 좆밥이구나 하고 호구잡으러 드는 인간들이 있다. 많다. 인간이 착해 보이면 세상은 호구잡으러 든다. 이런 인간들을 볼 때마다, 숙명같이 달라붙어 있는 코스프레 의상을 시퍼런 식칼로 확 찢어버리고 싶다.

착한 사람이 호구가 되는 시점이 있다. 남들이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때다. 또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깜깜한 인간으로 낙인찍힐 때다.




내가 친절하면 상대는 감사한다. 두 번 친절하면 감사의 정도가 떨어진다. 세 번 친절하면 상대는 친절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뭔가 좃같아서 친절을 철회하면 상대는 섭섭해하거나 분노한다. 호구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남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착한 것이다. 그가 다시 부탁을 하거나 다시 다시 부탁을 한다. 그 때부터는 착한 게 아니라 호구다.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착한 것이다. 거듭 거듭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때부터는 착한 게 아니라 호구다.

넘길 수 없는 일을 넘기는 것은 착한 것이다. 넘길 수 없는 일을 반복해 넘겨야 한다. 그 때부터는 착한 게 아니라 호구다.

나는 착한 사람이 좋다.

대부분 그렇겠지. 그래서 나도 남에게 되도록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착한 사람이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착한 사람은 착하기 때문에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거나 성질을 참고 있거나 한심한 상대를 되도록 이해하려고 억지 노력을 하고 있을 뿐이지, 깜깜이고 속도 없고 줏대도 없고 모욕감도 없고 물정도 몰라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착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남보다 훨씬 많은 양의 섬세한 불만과 예민한 분노가 일상적으로 들끓는다.

그리고 일정한 비등점을 넘어서면 폭발하게 된다.

그런 것이 없다면, 그건 착한 게 아니라 호구다.

착한 분들. 착한 것은 도덕적 능력입니다. 축하드려요. 다만 호구는 되지 마세요. 겉으론 사람 좋다는 소리 좀 듣겠지만, 그 자들은 뒤에서 저희들끼리 낄낄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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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초딩 2017/08/10 11:16 # 삭제 답글

    근래 무슨 일을 겪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착하게 살려는 사람으로서 좀 명심하게 됨을 느꼈습니다.
  • idiotique 2017/08/10 14:47 # 답글

    가끔 글을 읽고 가지만, 오랜만에 덧글 남기게 되네요, 잘 지내시지요? 오늘 읽으면서 모 대기업에 시달려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생활에 대한 상념이 마구 밀려오는 것이... 호의가 시작되면 권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한국사회의 관행 같아요. 그럴 때마다 포켓 호구몬 변신인가 싶어진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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