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힘, 각본의 힘 섞일雜 끓일湯 (Others)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보고 나오면서 든 느낌은 두 가지였다. 주연인 설경구는 연기를 잘 해서 예뻤고, 원작자인 김영하는 스토리가 좋아서 미웠다. 살인과 치매, 이 매력적이고도 상징적인 소재들을 그렇게 다 갖다 써버리면 남들은 어쩌란 말이냐.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다. 지난 주말에 중편인 소설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미워할 사람이 김영하가 아니거나 적어도 한 사람 더 있구나. 원작을 각색해 이 영화의 극본을 쓴 황조윤이라는 시나리오 작가다.

소설은 소설대로 좋았지만, 그 사유적인 스토리에 살을 붙이고 피를 흘려넣어 관객에게 생생하게 보여준 것은 오로지 황조윤과 감독 원신연의 공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작자 명단에는 '황조윤 각본, 원신연 각색'이라고 되어 있었다. 영화판에서 각본과 각색이 각각 의미하는 바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것 같다.)

영화는 소설 내용을 기본 축으로 하고 있지만, 중요하거나 사소한 부분에서 상당히 다른 내용이 첨가되었다. 원작을 영화 문법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을 텐데,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소설가의 힘에 못지 않은 시나리오 작가의 힘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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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작가 김남은 한 입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시절 방송작가를 확보하기 위하여 방송사들은 번번이 소설가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얘기를 건네면 그들은 대부분 흔쾌히 수락을 한다. 문제없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누구누구라고 공개를 할 수는 없지만 한 방송사는 저명 소설가들에게 드라마 집필용 고료를 사전 지급하고 부탁을 넣었다가 모두 떼이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써줄 것 같았던 그분들은 몇 년이 지나도 원고를 가져오지 않았고, 어떤 분은 원고를 가져왔는데 도저히 방송으로 제작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중략)

... 드라마는 진짜 만만한 것이 아니다. 소설도 어렵고 시도 어렵지만 드라마도 어렵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것이 드라마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 소설은 주인공의 태반이 실업자나 영세 회사 직원이거나 둘 중 하나이고 성격은 우울하고 어둡다. 정상 생활인이라기보다는 약간 그 아래쪽의 주인공이 많다. 그런 주인공이 끝없이 방황하고 자아를 찾아 헤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드라마에서는 그런 주인공은 아예 나올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드라마나 영화 같은 대중적 영상 스토리를 창작하는 일이 시나 소설과 같은 순수 문학 작업과 결이 매우 다른 것임은 분명한 듯하다. 그것은 각기 다른 재능과 취향의 영역이고, 한 쪽이 다른 쪽을 폄하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두 가지 재능이 잘 협업되어 나온 결과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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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영미가 외국 작가 흉내를 내어 특정 호텔에 방을 내달라고 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일이 어떻게 일단락됐는지 뒤늦게 찾아보니, 한 호텔이 방을 제공하겠다고 제안을 해왔고, 어떤 의사 부부가 그 돈을 내주겠다는 제안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사는 셋집의 주인이 논란을 전해듣고 계약을 지금 조건으로 연장해 주겠다고 하여 그냥 계속 눌러살기로 한 모양이다.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해프닝이었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시가, 그리고 문학이 우리에게 어떤 위상인가 하는 점을 곰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평생(혹은 적어도 청춘)을 바쳐 전력투구해 온 일이고, 그 업계에서 발군이라서 상도 받고 베스트 셀러도 만들고 중견 소리도 듣는 문학인이, 그렇게 전력투구한 일로부터 기초적인 의식주조차 보장받지 못해서 남의 자선을 바라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볍고 부박한 세태, 책이 안 읽히고 문학이 외면되는 시대, 그런 외면을 자초한 문학(인), 생각이 가치를 갖지 못하는 이디오크라시의 세상...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나, 결론은 문학을 해서는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이 몇백 대 일이고 대기업 시험이 몇천 대 일이라고 해도, 문학을 해서 웬만큼 먹고살기 위한 경쟁률은 그것보다 훨씬, 훠어얼씬 높다. 그런데도 그런 성취를 이룬 사람조차 기초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냥 떠밀려 하는 취업이 아니라 뜨겁게 열망하여 추구하는 일이 자신의 삶을 배반한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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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시대의 명문장가들은 모두 방송사에 있다. 글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부정하기도 어렵다. 그러다보니, 위 방송작가 입문서를 쓴 저자는 오로지 돈과 명예를 찾아 방송으로 몰려드는 준비되지 않은 작가 지망생들을 나무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문학에 기뻐하고 문학에 아파하며 문학을 삶의 지표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열정과 의지가 스스로를 좌절과 불우의 터널로 자발적으로 밀어넣는 것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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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세상과 소통하려는 의지나 열정이 있는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하다. 글을 써서 안 읽히면 적어도 절반은 쓴 사람 책임이다. 문학이 문학인들끼리만 이해하고 소통되는 밀교가 되면 문학인에게도, 대중에게도 불행하고 우리 사회 전체에도 불행한 일이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주인공 김병수는 이렇게 쓴다.


하루에 한 편씩 시를 외우기로 했다. 해보니 쉽지 않다.

요즘 시인들 시는 잘 모르겠다. 너무 어렵다.


이것은 김병수가 중증 치매 환자라서 그렇게 느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나도 치매 환자일 것이니까. 나도 요즘 나오는 시들은 읽어내기가 어렵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런 것을 비평해내는 평론가들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이렇게 상호 도취적인 비평들은 대개 근친상간의 맥락을 가졌다고 생각하므로 실은 별로 존경하지는 않는다.)

문장을 불필요하게 비틀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전달되기 어렵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지보다 그 현학적인 형식을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있겠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고 대세가 되면 아무도 읽지 않는다. 읽어도 의미를 전달해주지 못하는 암호 같은 문자 더미로 가득 찬 책을 살 이유는 없다.

내가 문학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시어들조차 잘 읽어내지 못하니까. 그러나 어쨌든 시와 소설이 널리 읽히는 세상, 재능 있고 생산력 있는 문학가가 중소기업 월급장이만큼이라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 시와 소설이 외면되고 시인이나 소설가가 의식주를 구해야 하는 세상보다 훨씬 바람직한 곳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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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딸기 2017/10/15 10:40 # 답글

    들풀님, 오랜만에 인사 남겨요. 글 보니 반가워서.. ㅎㅎ
  • deulpul 2017/10/18 09:47 #

    구 기자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시지요? 그 사이 사회부로 옮기셨군요. 바쁘지 않으실 때(란 찾기 어려우시겠지만) 정동께서 식사 한번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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