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청산이 피로하십니까 때時 일事 (Issues)



적폐 청산은 시대의 과제다. 국민의 요구가 정치권으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정치 구호로 변질된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시대의 과제임은 틀림없다. 지금은 한국 사회 곳곳에 쌓인 폐습과 범죄를 확인하고 경계하고 반성하여 나라를 정상 국가의 위상으로 끌어올리기에 최적인 상황이다. 의도하여 조성한 상황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이런 환경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잘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연인원 1천6백만 명을 넘는 국민들이 몇 달 동안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서 시위를 벌이고 그 결과 정권까지 바뀌면서 맞게 된 기회다. 이런 일은 세대에 한 번, 아니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음지에 쌓인 부조리와 범법들을 계속 양지에 드러내다 보니, 이런 적폐들에 좀 둔감해지는 모양이다. 매일매일 신문에 오르는 적폐의 내용들은 모두 하나같이 경천동지할 일들인데도 말이다. 예컨대 미국의 국방장관이 대통령 선거에서 흑인 대통령의 당선을 막기 위해 병사들을 내몰아서 시민들을 상대로 하여 댓글 공작을 벌인 혐의가 드러났다고 해 보자. 백악관의 참모가 그런 일을 보고받고 추인하고 현직 대통령까지 관여된 정황이 드러났다고 해 보자. 또는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부시 대통령의 재선 당선을 위해 간부들을 동원해 선거개입 공작을 벌인 혐의가 드러났다고 해 보자.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가진자들과 공직자들의 범죄와 탈법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한국이라도, 지금 드러나는 적폐들은 보통 때라면 그중 단 하나만이라도 몇 주, 몇 달 동안 큰 물의를 일으키고 정치적 논란이 되었을 내용들이다. 그런데 하루면 넘어간다. 다음날은 또다른 적폐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이렇게 쓰레기 매립장같이 운영되었던가 하여 매번 기가 막히긴 하지만, 반복되는 노출을 계속 겪자니 충격도는 어쩔 수 없이 떨어진다.

이것은 지금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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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둔감함이 번져가는 현상은 범죄에 가장 민감하여야 할 사법부의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법원은 댓글 공작과 대선 개입의 책임자들을 대상으로 청구된 구속영장을 잇달아 기각하고 있다.

구속영장 발부가 범죄를 확정하는 것도 아니고, 영장이 기각되더라도 얼마든지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사안의 중대함과 피의자들의 위상을 고려하면, 영장 기각이 합리적인 판단인가를 회의할 수밖에 없다. '공작'을 벌이던 이들이고 또 그 정점에 있던 인물들이다. 증거가 남아있다면 그것을 없애고 감추는 데 최적화되었고 또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 아닌가.

법원은 이런 자들을 석방하면서 '일부 혐의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은 상식적인 구속 사유의 미비(일정한 주거가 있고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없으며 도망할 염려가 없을 것, 형사소송법 제70조)보다 더 심각한 말이다. 또 하나의 구속 사유, 즉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 강도 사건이라면 그런 의심을 판별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정치 공작의 주도나 추인과 같은 복잡한 범죄에 대해 혐의의 있고 없음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더구나 증거 인멸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혐의가 없을 수도 있다는 판단으로 영장 청구를 기각한 것이다.

법원이 다른 사건들에서도 이렇게 관대하고 사려 깊은 영장 심사를 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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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둔감함은 적폐 청산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폐습 세력에게는 어렵사리 발견한 탈출의 틈새 같은 게 될 것이다. 이들은 국민의 분노가 무뎌지는 상황을 활용하여 적폐 청산의 피로감을 강조하고, 이제는 손을 뗄 때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구 정권의 적폐를 수사하는 일을 총괄하는 검찰총장이 '피로감'을 이야기하고, 어떤 신문은 '적폐 청산이 지겨워진 이유'라는 제목의 기자 칼럼을 통해, 적폐 수사에 국민의 공감대가 떨어진다면서 '적폐 청산에 매진하는 현 상황에 하루빨리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의 공감대가 떨어진다'고 했지만,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70% 가까이는 구 정권들과 국가정보원이 벌인 적폐를 파헤치는 데 대해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 신문이 말하는 '공감대가 떨어지는 국민'은 어떤 이들인지 궁금하다.

적폐 청산은 컨베이어 벨트나 무빙 워크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과 흡사하다. 달리지 않으면 자빠지며, 자빠지면 뒤로 밀려간다. 앙시앙 레짐에 만족하는 세력, 거기서 이득을 보는 세력, 변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이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있다. 더욱 견결히 악습을 드러내고 부조리가 다시 자랄 여지를 없애버리는 일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무뎌질 때도 아니고 피로감을 이야기할 때도 아니다. 똥통에 빠진 사람이 몸을 빼 나오면서 피곤하다고 상반신만 빼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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