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전 논란', 한강은 억울하다 때時 일事 (Issues)

<뉴욕타임스>가 소설가 한강의 칼럼 '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남한은 전율한다)'를 실은 것은 10월 7일이다. 북한과 미국 간의 신경전이 물리적 대결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미국발 전쟁 시나리오가 활발히 전해 오는 시점이었다. 칼럼은 한국 사람들이 북한의 위협에 왜 그리 무심한지, 그리고 왜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서는 안 되는지를 필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칼럼이 실리고 나서 약간의 논란이 일었다.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은 한강의 글에서 몇몇 문구를 골라 트집을 잡았다. 국회에서는 외무장관을 앉혀놓고 '작가의 역사 인식'을 논의했고, 작가나 지식인의 사회 참여 같은 구닥다리 주제가 새삼스레 거론되었다. 한 신문의 논설위원은 '누가 당신에게 한국인을 대변할 자격을 주었는가' 같은 유치한 질문을 던졌다.

이 논설위원이 주장을 펴는 중요한 전제는 "한강은 모든 전쟁은 인간을 '인간 이하'의 상태로 만든다고 했다. 그렇다면..."이다. 하지만 한강은 전쟁이 인간을 인간 이하 상태로 만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인간 이하 상태를 상정한 자들이 전쟁을 일으킨다고 썼을 뿐이다.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읽고 있다. 따라서 "그렇다면..." 이후가 모두 아이고 의미없다.

해당 논설위원에게는 영어를 좀더 공부하든지, 아니면 (여러 사람이 한강의 글을 번역해 올렸으므로) 인터넷에서 신뢰할 만한 문서를 찾아내는 방법을 좀더 공부하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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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설위원은 한강이 어떤 경위로 이 칼럼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고 한다. 나도 궁금하다. 물론 나의 궁금함과 그의 궁금함의 연원은 좀 다를 것이다. 어쨌든 그 경위가 밝혀졌다. 한강은 12월 12일자로 나온 계간 <문학동네> 2017년 겨울호에 자신이 <뉴욕타임스>에 보낸 초고와 함께, 칼럼이 실린 경위를 밝혔다(위 사진).

"기고문을 청탁받은 것은 5월이었지만, 당시에는 정중히 사양했다. 그후 말들의 전쟁이 가속화되면서, 쉽게 전쟁을 말하는 위정자들의 태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한국에는 어떤 위기에도 무감각하고 둔감한 익명의 대중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국외의 분위기도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오직 한 가지, 여기에 구체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실감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초고와 최종 게재본 사이에 차이가 있음도 밝혔다.

"... 초고의 삼분의 일 이상을 부분부분 덜어내고 전체적으로 맥락을 다시 다듬어 종이신문의 규격에 맞춘 것이었다. 신문사에서 붙인 제목과는 달리, 원문의 제목은 '누가 '승리'의 시나리오를 쓰는가?'였다."

그랬군요.

그런데 <뉴욕타임스>는 이 칼럼 영역본을 게재하면서, 특이하게도 중국어판을 동시에 게재했다. 이미 갖고 있는 한국어판은 제외하고 일부러 중국어 번역을 해서 올린 이유가 궁금하다. 어쨌든 이런 상황 때문에, 여러 블로거들이 한국 사람이 쓴 한글 칼럼의 영역본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는 수고를 자청했다. 한강은 "기사 게재 후 삼십 일간 뉴욕타임스에 저작권이 묶이기 때문에, 모국어로 쓴 원문을 이제 이 지면에 실을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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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초고가 공개되자, 나는 한 가지 궁금증을 새로 갖게 되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한강의 한국어 칼럼을 영어로 옮긴 사람은 데보라 스미스. 한강이 맨부커 상을 받은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바로 그 사람이다.

<채식주의자>를 놓고 번역 문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스미스의 번역에 오역이 많고 첨삭이 심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 기사, 또 이 기사.)

그런데 이번 칼럼도 스미스가 번역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역 없이 잘 옮겨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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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원본과 게재본을 비교하면, 한강의 말처럼 분량을 조절한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이것은 글을 종이신문의 판형에 맞춰야 하는 신문사의 작업이었을 것이다. 삭제한 곳은 크게 네 곳이다.

1) 한국적 환경이 크게 드러난 부분(촛불 시위 때의 시민들 모습, 촛불혁명 이후 전개된 정치 상황)
2) 개인적인 감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전쟁과 관련한 개인의 자세를 독백으로 묘사)
3) 한국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부분(전쟁이 주는 세계사적 교훈)
4) 미국 독자에게 불편할 수 있는 부분(한반도 전쟁을 거론하는 것은 한국인을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 상정하는 퇴행적 사고방식)

나로서는 이러한 분량 조절이 적당한 것이었다고 생각되며, 원 필자도 크게 불만스러워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일부 내용의 순서를 바꾼 것이다. 이것은 스미스가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신문사가 그렇게 했는지 불명확하다. (나는 후자라고 추정한다.)

단락이나 문장의 순서가 바뀐 곳을 정밀하게 추적하다 보면, 원본과 게재본 모두의 서술 방식을 납득하게 된다. 양자의 구성은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으며, 두 판본이 다른 것은 그 이유가 좀 다르기 때문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인 한강이 쓴 원본의 구성은 과거의 전쟁 경험과 최근의 촛불혁명, 전쟁과 인간에 대해 획득한 인식 등을 재료로 하여 최근의 위기 상황을 돌아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번역본의 구성은 소재가 비슷한 부분을 한데 모으고 명료하게 구분하는 방식이 되어, 좀더 기계적이고 기승전결적인 느낌을 준다. 이것은 영미식 글쓰기의 방식을 적용한 탓이라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두 판본의 전개 방식에 대해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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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스미스는 이번에는 오역을 하지 않았나?

불행히도 명백한 오역이 몇 군데 있다.

1.
(원문) 그 참혹한 삼년을 통과하며 수백만 명이 살해되었고 전 국토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번역) Millions of people were butchered over those three brutal years, and the former national territory was utterly destroyed.

'전 국토'를 'former national territory'라고 했다. 全(whole)을 前(former)로 착각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全은 중요하다. 전쟁이 나면 남북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 전체가 파괴될 것이라는 현실 인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원문) 미군들이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포함한 민간인 수백 명을 철교 아래에 밀어넣고...
(번역) American soldiers drove hundreds of citizens, mainly women and children, under a stone bridge...

'철교(鐵橋)’를 ‘stone bridge’라고 했다. (철교는 '철로 된 다리'뿐 아니라 '철로가 지나는 다리인 철도교의 준말'의 의미도 있다. 실제 노근리 다리는 돌(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번역자 스미스가 오히려 사실을 찾아보고 적절히 옮겼다고 보아야 옳을 듯하다. 아래 댓글에서 메르린님이 지적해 주셔서 추가합니다.)

3.
(원문) 지키고 싶은 일상이 있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전쟁을 두려워한다.)
(번역) Because there are days we still want to see arrive. Because there are loved ones beside us.

'지키고 싶은 일상'을 'days we still want to see arrive'라고 했다. 멋진 표현이긴 하지만 원작자가 원한 표현은 아니다. 원작자는 현재를, 번역자는 미래를 말하고 있다.

4.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다. 번역자의 작업인지 신문사의 작업인지 확실치 않지만 심각한 곳이다. 바로, 한강의 칼럼 트집잡기의 핵심이었던 '대리전' 부분이다.

(원문)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주변의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가 분할된 뒤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 실행된 일종의 이념적 대리전이었다.
(번역) The Korean War was a proxy war enacted on the Korean Peninsula by neighboring great powers.

원문 내용 중 번역문에서 살리고 죽인 것을 다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주변의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가 분할된 뒤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 실행된 일종의 이념적 대리전이었다.


이것은 매우 부적절하고 위험한 번역이요 편집이다.

한강은 한국전쟁의 맥락을 이야기했다. 2차대전의 종전과 그로부터 시작된 냉전 체제,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 분할 등이 한국 전쟁의 맥락이고, 따라서 한국 전쟁은 냉전 당사국인 강대국들의 이념적 대리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문은 무슨 이유에선지 중요한 맥락을 다 빼버리고, 그냥 한국전쟁이 강대국의 대리전이라고만 했다. 신문사가 기고자의 내용을 제멋대로 넣고 빼서 톤을 바꿔버리는 일은 좀처럼 드물기 때문에, 그리고 분량을 줄이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에, 나는 이 마사지가 번역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맥락을 자르고 서툰 방식으로 글을 옮겨 놓았으니, 조심스러운 글은 유치하고도 위험한 모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보수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트집을 잡기 딱 좋은 꼴이 된 것이다. 미국인이 읽기에는 좀더 편한 모양이긴 하다.

이런 일이 벌어졌으므로, '대리전 논란'과 관련해 한강은 억울한 측면이 있다.

원문을 잘 살려 번역이 이루어졌다 해도, 한반도 사태를 대화와 평화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마뜩치 않게 보는 보수 집단은, 그 같은 주장을 편 한강의 글을 놓고 어쨌든 여전히 트집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이 원문 내용에 충실했더라면 그의 글을 좀더 수긍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들의 트집잡기가 좀더 생떼스럽고 유치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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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메르린 2017/12/16 16:01 # 답글

    안녕하세요, 한강빠로서 뉴욕 타임즈에 한강 번역문이 게재되었을 때 국문본을 검색했지만 찾지 못해서 직접 번역을 했는데 본문 중 여러 사람이 뉴욕 타임즈 게재문을 국문역했다고 하신 것을 보니 제 짧은 검색 능력이 부끄럽습니다.

    지적하신 부분 중 2번에서 한강의 원문에 있는 "철교"를 거론하셨는데, 구글에서 "노근리"로 검색하시면 철이 아닌 돌로 된 아치형 구조물 사진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검색 결과를 훑어 보면 철길을 위해 돌로 다리를 만든 것 같은데, 복원된 것인지 아니면 건축학적으로 저런 구조물도 철교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통번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번역 작업을 하다 보면 확실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검색하게 되는데, 아마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 씨도 조사 과정을 거치지 않았나 합니다. 검색으로 돌로 된 구조물을 확인했다면 원문이 "철교"로 되어 있어도 그걸 "steel bridge"로 옮기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문을 건드릴 권한은 없지만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는 다른 언어권의 독자에 대해 원저자를 아껴 주는 것도 역자로서의 윤리니까요. 동종 업계 종사자로서 저는 오히려 데보라 스미스 씨가 들여야 할 품을 아끼며 작업을 허투루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노근리 쌍굴다리"로 특정하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말이 너무 길어졌는데, 요약하자면 "2번은 열심히 하려다 그런걸 거예요ㅠㅠ"입니다.

    한강이 직접 쓴 글 읽고 싶었는데 이따 집에 가면서 하나 사야겠네요. 항상 블로그 즐겨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deulpul 2018/01/02 23:35 #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본문에도 썼지만, 찾아보니 그 말에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저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저도 노근리 다리의 구체적인 모습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번역을 하면서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하고 확인하는 과정은 고통스럽기도 하고 한편 즐거움이자 보람이기도 하지요. 날카로운 지적 다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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