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커뮤니티에 지불하는 비용 섞일雜 끓일湯 (Others)

장강명이 쓴 소설 <댓글부대>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단락 구분은 내가).


한때는 인터넷이 영원히 익명의 공간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 헛소문이나 추측, 잘못된 정보가 많이 나온다는 건 그때도 알았어. 그래도 좋은 정보가 많이 나오면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자기 생각들을 고칠 줄 알았어. 자정작용이 일어날 줄 알았던 거지.

하지만 이제는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아. 인터넷에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자정작용이 일어날 수가 없어. 오히려 그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끼리끼리 뭉치는 거 말이야. 사람들이 어떻게 TV를 보는지 보라고. 채널 돌리는 것도 귀찮아서 광고를 그냥 참고 보잖아.

인터넷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은 절대로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고치려 들지 않아.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뭔가를 배우려 드는 대신, 애착이 가는 커뮤니티를 두세 개 정해놓고 거기 새로운 글 올라오는 거 없나 수시로 확인하지. 그런데 그 커뮤니티들은 대개 어떤 식으로든 크게 편향돼 있어. 취향과 성향 중심으로 모인 공간이다보니 학교나 직장처럼 다양한 인간이 모이는 오프라인 공간보다 편향된 정도가 훨씬 더 심한 게 당연해. 그런 데서 오래 지내다보면 어떻게 되겠어?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편향되고 편벽하게 되는 거지.




내가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사이트에 가본 것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다섯 손가락이라고 쓰고 싶었지만, 기억을 못 하는 경우도 있을지 몰라 넉넉히 열 손가락으로 늘렸다. 이 몇 번의 방문은 1) 어떤 이슈가 불거졌을 때 다른 글에 올라온 링크를 눌러서 들어갔거나, 아니면 2) 구글 검색 결과 일베 게시물이 상위에 나왔을 때다. 언젠가부터는 2)번의 경우가 발생해도 그리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왜 일베를 피하는가? 무섭기 때문이다.

뭣이 무섭습니까? 일베 사이트 다닌다고 손가락질 받을 게 무섭노? 글 썼다 ㅁㅈㅎ될 게 무섭노?

내 사고방식이 나도 모르게 일베화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 무섭다.

인간의 인식이나 의지란 굳고 견실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직간접적인 체험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보드라운 존재다. 애초에 인식이나 의지란 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는가. 자극적이고 일방적인 시끄러운 소리들은 통각을 둔화시키고 인식과 의지를 야금야금 잠식한다. 처음엔 개소리로 들리던 것이 현명하고 바람직한 의견으로 바뀌어 들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공부든 생활이든 설득이든 이데올로기든, 그것이 성립하는 기본 원리는 다 똑같다. 반복이 인간을 변화시킨다.

진화, 혹은 퇴행은 주체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본인이 상식적인 인간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진화나 퇴행을 겪고 나서도 똑같은 믿음을 유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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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내가 일베 사이트에 가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죽음에 대한 5단계 태도를 빌려와 예상해 보자.

1. 부정:
(일베에 대해 자꾸 듣게 된다) 일베? 그따위 사이트는 가까이하는 것조차 안 돼. 안 보여. 안 들려.

2. 분노:
(우연히 몇 번 들르게 된다) 아니, 이런 개쓰레기 같은 사이트가 있나. 그렇고그런 놈들만 모여서 벌레같은 일만 벌이고 있네. 일베충!

3. 협상:
(보다 보니 좋은 점도 보인다) 응? 그런데 맞는 말도 많이 하네? 쓸만한 정보도 있고? 개소리는 걸러 듣고 정보만 얻으면 되겠지.

4. 우울:
(누가 나에게 일베 하냐고 묻는다) 아니, 나 일베 안 하는데. 나 그런 인간 아니거든. 하지만 난 일베를 하지. 끊기도 어려워. ㅜ 난 어느 새 일배충이 되고 있나...

5. 수용:
(이렇게 모순적으로 살 수는 없다) 일베든 오유든, 모두 각기 의견이 있는 거야.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건 나쁜 게 아냐. 무리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의미도 있잖아? 취향 존중, 성향 존중, 의견 존중해야지. 게다가 일베를 만든 건 내로남불 진보진영 탓이기도 해. 아, 일베 사이트가 또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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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 사이트에도 유용한 정보들이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전적으로 나쁘거나 전적으로 좋을 수 없듯이, 웹사이트나 커뮤니티도 그럴 것이다. 그런 유용한 정보들은 분명 일상에 도움이 되고, 모르는 편보다는 아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도 넘친다.

그런 정보를 얻는 데 드는 비용은 없을까?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운동이 한창일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일보>는 정보량이 많고 경제 기사가 좋다. 정치면 보지 않고 경제면만 보면 된다."

나는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이든 한겨레든 신문은 하나의 패키지이고, 그 패키지 전체를 감싸고 있는 이념과 취향과 성향이 있다. 그 중에서 일부만 빼내서 자의적으로 섭취할 수 없다. 자신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 이념과 취향과 성향에 익숙해져 갈 뿐이다.

그것이 유용한 정보를 얻으면서 지불하는 대가이다. 편향의 대열에 참가하고 버블에 갖히게 되는 것.

인터넷 커뮤니티의 위험은 더 직접적이다. 신문은 이념과 취향과 성향을 은연히 감추고 장사를 하지만, 일부 커뮤니티는 그런 것을 정체성으로 삼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장사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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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일베충'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멀쩡한 사람들이 합리와 상식이라는 번데기를 벗고 일베충으로 진화한다. 그 중에는 교사도 있고 KBS 신입 기자도 있고 SBS 직원도 있다. 재미있어서 다니다 보니 어느 새 광주항쟁은 북한 특수공작원들의 남파 공작이 되어 있고, 세월호 유가족은 시체팔이 장사꾼이 되어 있다.

물론 일베 사이트는 대표적인 예를 들었을 뿐이다. 많은 커뮤니티에서 똑같은 판이 벌어진다.

이를테면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도 비슷하다. 수십 년 간 배워온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새로운 상식으로 정당화된다. 그런 사람들이 득실득실하는 데로 풍덩 들어갔기 때문이다. 대부분 처음에는 병약한 아이의 복리를 위해 찾아간 사람들이다. 하지만 필요한 정보만 빼먹고 나올 수는 없다. 들어올 땐 자유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아이도 자신도 망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트래픽이 자원이고 화폐다. 공짜 서비스처럼 보이는 것을 이용할 때, 우리는 늘 '조회수를 올려주는 것, 트래픽을 유발하는 것이 그 대가'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가 치러야 할 더 큰 대가는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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