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남영동 대공분실 때時 일事 (Issues)



영화 <1987> 보셨나요.

지난 12월 29일 개봉한 이 영화를 저는 두 주 지난 오늘, 1월 11일에 보았습니다.

최근 시간이 많아서(이유는 묻지마) 개봉관에서 영화들을 좀 보고 있지만, 이렇게 상영관이 꽉 찬 상황을 겪은 것은 근래 처음이었습니다. 평일 이른 오후, 사람이 몰릴 때가 아닌데도 만석입니다.

표를 살 때 터치스크린에 좌석을 찍어 넣는데 안 먹는 겁니다. 이거 왜 그래 씨앙 하고 다른 색으로 표시된 열악한 자리를 찍었더니 먹혔습니다. 가운데 자리는 다 찼던 것이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객석에는 의외로 20대 초반 젊은 관객이 많았습니다. 영화는 현재의 사람들을 과거와 잘 소통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왜 이 영화를 보러 왔고 보고 나서 어떻게 느꼈는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부터 의미있는 일이겠지요.




<1987>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골라내라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antagonist인 박처원 치안감(김윤석 연기)이지만, 이 영화는 박처원의 시각으로 그려진 것은 아닙니다. 감독이나 작가가 의도한 주인공은 따로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당시의 학생들과 일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스크린에서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관객들이 모두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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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이 영화는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기 며칠 전인 1월 8일, 저는 박종철이 고문 살해를 당한 장소이자 이 영화의 무대이기도 한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을 찾아가 봤습니다.

건물을 둘러보는 동안 몇 사람을 스쳐지나가듯 만났습니다. 그중 한 팀은 여성 두 분이었는데, 대공분실 5층 박종철 살해 현장을 들여다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박종철이 몇 학번이지?"
"저기 조기(弔旗)에 84라고 되어 있네."
"너도 84잖아?"
"아니, 난 85."

두 분의 얼굴을 다시 보았습니다. 아니 85학번이라면 50대 초반인데... 웬 꽃다운 30대 후반 외모의 여성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그 다음 스쳐지나가며 만난 사람들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친구들 세 명이었습니다.

"야, 여기 그러니까 갇혀서 고문 당한 데지?"
"그래. 그런 사람들 잡아다 두는 교도소지."
"하루이틀도 아니고, 살면서 고문당하면 괴로울 것 같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교도소가 아니죠. 교도소라면 슬기롭게 감빵 생활을 하며 적당히 처신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여기는 피의자든 혐의자든 참고인이든 닥치고 끌어와 고문으로 조지는 치외법권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든 잘 알지 못하든, 그것도 어쨌든 역사와 대화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서, 저는 굳이 간섭하며 바로잡아주지 않았습니다. 박종철기념사업회 김학규 사무총장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절한 안내를 받지 못해서, 작게는 사실을 오해하고 크게는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더군요.

여하튼 저는 예전에 전철 남영역을 지나며 본 대공분실을 처음으로 들어가 구석구석 살펴보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과거란, 알 수 없는 이유로 떠나버린 벗처럼 끈질긴 것이어서, 시간이 많이 흘러도 우리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음산한 건물의 안팎을 둘러보노라면 그런 사실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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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이라는 국가 폭력으로 살해당한 박종철을 기리는 사업을 하는 박종철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진정한 인권 메카로 바꾸자는 청원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가 소유인 옛 대공분실 건물을 넘겨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해자였던 경찰청이 관리하는 한적하고 파리 날리는 이 공간을 시민사회가 운영함으로써, 과거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기념과 치유, 교육 공간으로 바꾸자는 뜻이라고 합니다.

30년도 넘은 역사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또 잊어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음지에서 끈질기게 매달려온 사람들이 군사독재 시절의 고문과 인권 문제를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붙잡아두고 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서 영화로 그려진 현장을 살펴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아니, 주말엔 안 됩니다. 박종철의 기일(14일)인 이번 주말은 예외적으로 열릴지 모르지만, 보통 이 건물은 주말에는 문을 닫습니다. 물론 공무원인 경찰이 관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일엔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찾아와보기조차 어렵습니다.

경찰청이, 국가가 진정 인권을 생각한다면 이런 것부터 고쳐 나가야 하겠지요. 못 하겠다면 청원대로, 그렇게 할 의지로 충만한 시민사회에 운영을 넘기든지요.

대의는 거창하지만, 그리로 가는 길은 소박합니다. 문제는 오로지 인식과 의지뿐입니다.


(이 글은 영화 <1987>의 제작 및 배급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어떠한 반대급부도 받지 않고 쓴 글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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