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사로잡힌 악령 때時 일事 (Issues)

미투 운동의 와중에 드러난 민족시인 고은의 면모는 추잡하고도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드러났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미 드러난 것이 새삼 문제가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문단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고 하니까. 다 알던 일인데 새삼스레 화들짝 놀라는 척 한다고 할까.

그래서 나는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행각을 용인하고 더 나아가 그로부터 음행과 농락을 문학하는 자의 낭만 비슷한 것으로 배워온 이들, 문학의 본령이 인간과 시대와 권력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임을 잊고 부당한 권위에 복종해온 이들, 입이 있고 펜이 있고 지면이 있으면서도 한 마디도 쓰지 않아왔던 이들 역시 동급의 질타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고은 사태와 관련해 이문열이 1995년에 낸 소설 한 편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단편 '사로잡힌 악령'이다. 여기서 묘사되는 주인공은 누가 봐도 고은이고, 그때문에 논란이 되어 결국 암흑 속에 봉인되어 버린 작품이다. 이문열은 고은에 대해 '혐오와 경멸'(본문에 나오는 말)을 참을 수 없었던지 이런 작품까지 써 발표했지만, 그 자신이 문화권력으로 손꼽혔으면서도 또다른 거대한 권력의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소설을 철회하고 말았다.


(사진은 모두 위키에서.)


소설을 내고 물린 사정은 아래에 전문을 옮긴 1995년 1월 18일자 <한겨레> 기사를 참고할 만하다.


이문열 단편 ‘사로잡힌 악령’ 파문
◎특정시인 인간성·문학 맹비난… 논란일자 “빼겠다”

인기 작가 이문열(47·사진)씨가 최근 전작으로 발표한 단편소설이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제의 소설은 이씨가 8년 만에 새로 묶어낸 중단편집 〈아우와의 만남〉(둥지)에 수록된 ‘사로잡힌 악령’이다. 잡지 발표를 거치지 않고 작품집에 실림으로써 비로소 공개된 이 소설이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적인 시인을 연상시키는 인물을 등장시켜 극단적으로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조인을 1인칭 화자로 내세운 이 작품은 그의 시선에 포착되는 한 승려 출신 시인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환속 승려 시인은 초기에는 자신이 유명한 고승의 상좌이자 시인이라는 사실을 이용해 문화예술계 등의 명사들을 ‘사냥’하듯 교분을 트는가 하면, 문학을 지망하는 여성들과 친구의 부인 등을 마구잡이로 농락하는 등 악마성을 과시한다.

그러던 그가 자신이 본래 속했던 이른바 ‘순문학’ 진영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자 갑자기 재야 민주투사의 탈을 뒤집어쓴다. 70, 80년대를 통해 저항문학의 선두에 섰던 그는, 그러나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등 상황이 바뀌자 또다시 ‘저항시인’의 탈을 벗어던져버린다.

문제의 시인의 인간성은 물론 그 문학조차도‘얄팍한 속임수와 거짓’으로 폄하하고 있는 이 작품이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작가 이문열씨는 “이 소설을 〈아우와의 만남〉에서 빼는 것은 물론 나의 작품 목록에서도 영원히 제외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는 “처음에는 순전히 상상력에 의존해 한 악마적 인물을 그리려 했는데, 글을 써나가면서 모델이 점점 어떤 실존인물을 닮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 소설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데 대해 “착잡하다”며 “쓰는 이의 부주의도 작용했겠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자신만만하던 글쓰기가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기사는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적인 시인을 연상시키는 인물을 등장시켜 극단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시인의 인간성은 물론... 폄하하고 있다'고 썼다. 지금 준엄한 질타와 공분을 사는 바로 그 사람, 바로 그 일들이 1995년 기사에서는 '극단적 비난' '폄하'라고 묘사된다. 23년 세월이 야기하는 인식차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이문열'이 '고은'을 비난하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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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소설은 작품집에서 뺐기 때문에 그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월간조선>은 고은의 성추행 사실이 고발된 뒤 이 작품을 전문 입수했다며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입수라니 거창하지만, 이문열이 따로 건네주었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오른 것을 그대로 퍼왔다.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알 수 없다.

내용을 읽어 보면, 주인공 '악령'의 엽색 행각, 습관적인 성추행과 성폭행, 가식과 허세, 처세술, 작품의 허접함, 자기 과시, 위악, 혹세무민 등에 대해 조심스러우면서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인간의 명성에 이끌려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문학 지망생들, 또 그를 추앙하고 숭배하는 대중에 대한 실망과 혐오도 짙게 읽힌다.

다음은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장면, 특히 지금의 사태와 관련하여 모골이 송연한 장면들이다. 물론 소설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므로, 이문열은 작품에 묘사한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고은의 행적이라고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여기 부분적으로 옮겨온 것보다 위에 링크한 전문을 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체를 옮기지 않은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듯. <월간조선>의 링크가 죽어버렸다. 정상화?되면 다시 링크함.)


힘이 없는 악은 의미가 없다. 악이 악다워지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권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재력이든, 지식이나 기술 혹은 특수한 재능이든 상대를 강제하거나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녀야만 악은 악답게 자랄 수가 있다.

그의 악이 의지해 자란 힘은 말과 글을 다루는 재능이었다. 말의 재능은 그의 ‘명사(名士) 사냥’ 시절에 이미 충분하게 발휘되었다. 그 말재주를 빼면 그가 뒷날 펼쳐 보인 화려한 교유록(交遊錄)은 다 설명되기 어렵다.


문단도 차츰 처음의 홀림과도 같은 열광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 하지만 나머지 다수한 대중들은 달랐다. 대중 잡지들은 아직도 다투어 그를 찾았고 이제는 시가 아니라 부황한 명성과 그걸 향한 대중의 맹목적인 열기가 상승작용을 해 대중적인 명성은 오히려 더 높아가는 듯했다. 질(膣) 속에 탁구공을 넣고 다녀 팬티가 언제나 음수(陰水)에 젖어 있는 청순한 귀공녀의 얘기 따위가 가져다준 인기에서 출발한 것이겠지만 내게는 참으로 이해 안 되는 열기의 상승작용이었다.


내가 식사에서 곁들인 술로 약간은 격앙되어 사건의 개요를 말하고 문단에서의 실상을 묻자 선배가 풀풀 웃으며 받았다.

“그만 일로 감옥엘 간다면 그 사람 아마 평생 햇볕 보기 힘들 걸. 요즘도 쉬쉬하고 있는 게 한 건 있는 것 같던데…….”
“그건 또 어떤 일인데요?”
“역시 친구 여편네를 건든 모양인데 이번에도 일은 그 비슷하게 풀릴 것 같더라구. 서로 입에 밥을 내먹을 만큼 친했던 교수가 외국에 공부하러 간 사이에 그 마누라를 덮친 거라."


그의 악이 번성하는 한 파렴치한 엽색(獵色)의 식단도 풍성했다. 자랑스레 휘젓고 다니는 색주가는 기본이었고 손쉽고 뒷말 없는 유부녀는 속되게 표현해 간식이었다. 더욱 악의 섞어 말하자면 신선한 후식도 그 무렵의 그에게는 흔했다. 시인의 허명에 조급했다가 화대(花代)도 없이 몇 달 침실봉사만 한 신출내기 여류시인이 있는가 하면, 뜻도 모르고 관중의 갈채에만 홀려 있다가 느닷없이 그의 침실로 끌려가 눈물과 후회 속의 아침을 맞는 얼치기 문학소녀가 있었고, 그 자신이 과장하는 시인이란 호칭에 눈부셔 옷 벗기는 줄도 모르다가 살이 살을 비집고 들어서야 놀라 때늦은 비명을 지르는 철없는 여대생도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그가 자신의 성적인 행실 때문에 공식적으로 기소된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그게 그의 무죄함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는 실제로 그 방면의 고소고발을 몇 건이나 당했는데 그걸 간접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근년 그 자신의 손에 의해 작성된 그의 연보다.


남발하여 희석된 글과 지켜지지 않는 약속 때문에 그를 거절하는 잡지사와 출판사가 생기고 여러 가지 낭패한 소식들도 간간히 들렸다. 어디선가는 좋지 못한 행실로 술상을 덮어쓰고, 또 어디선가는 그동안 단짝으로 어울려 다니던 문사에게까지 된통으로 얻어맞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유부녀를 집적이다 눈이 뒤집혀 덤비는 그 남편에게 쫓겨 밤중에 담을 넘는 걸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가 북채만한 여동생을 데리고 나타나 칼을 빼들고 설치는 청년 앞에 볼품없이 꿇어앉아 싹싹 비는 꼴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대로 저 악이 소멸해 버리면 어쩌나 ― 그런 기묘한 걱정이 어렴풋하게나마 처음으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아마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현혹시키고 농락하고 해친 만큼 명백하게 처벌을 받거나 그 자체가 뒤집힌 교훈이 될 수 있는 폭발적인 몰락을 내 증오와 적개심은 요구하고 있었다. 어정쩡한 회개와 함께 선의 그늘로 흐물흐물 녹아 버리는 악이야말로 가장 죄 많은 악이었다.


"사실 그 사람 근년 들어 갈 곳이 없었어. 이른바 순문학 마당에서는 모든 게 거덜 난 상태였지. 아무도 그를 진심으로 반겨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대로 가다가는 여럿에게 멱살을 잡혀 문단 밖으로 내동댕이쳐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느꼈을 거야. 그런데 그 구속문인 석방탄원선가 뭔가가 길을 열어 준 거라. 우연히 어떤 잡지사에 들렀다가 그 탄원서를 작성하는 현장에 있게 돼 술김에 서명한 건데 ― 그 바람에 남산으로 끌려가 한 사나흘 호된 취조를 당했지. 그런데 나와 보니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어. 진심으로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세계가. 아직은 작지만 어쩌면 앞으로는 이 사회를 주도할 세력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쪽 순문단 쪽에서 점차 천덕꾸러기로 내몰리던 판이라 더욱 감격적이었을지도 모르지. 시작은 틀림없이 그리 됐을 거라."


그는 이제 거짓, 뻔뻔스러움, 천박, 비열 따위 다분히 감정적인 탐구의 사정권을 가뿐히 벗어나 거창한 반독재의 대의 뒤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뒤이은 유신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더욱 휘황한 빛을 뿜기 시작한 반독재의 대의는 그의 지난 행적에 대해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반독재의 투사, 저항시인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히 독재자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의심받을 일이었다.


거기다가 그 동지들의 철저한 함구도 그의 악을 보호해 주었다. 나중 그토록 심하게 규탄 받은 그의 여러 악업들은 그때만 해도 운동의 과정에 흔히 있을 수 있는 동지의 실수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것들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은 곧 그들 운동의 내분을 드러내는 것쯤으로 여겨져 내부에서만 은밀한 소문으로 떠돌았다.


‘그는 우리 시단의 젊은이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남겼다. 그의 시는 애초부터 홀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시가 못되었다. 처음 그의 시는 특이한 출신과 연출된 기행(奇行), 천재 흉내, 그리고 개인적 친분 같은 것들의 부축을 받아 실제 이상의 평가를 획득했으나 오래 지속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숨어든 것이 이데올로기의 광휘와 집단적 옹호의 우산 밑이었다. 과연 그런 그의 결정은 현명한 것이었고 성과도 눈부셨다. 선택의 시기는 절묘했고 방식도 극히 효율적이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시를 훌륭히 지켜냈고, 그 이상 동시대의 비판과 험구뿐만 아니라 세월조차 찍어 넘기기 힘든 거목으로 키워내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이다. 그를 본보기로 출발한 다수의 설익은 영혼들이다. 예외는 언제나 한 번 뿐이고 , 특히 뒤따라간 다수에게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 불행한 다수를 어쩔 것이랴…….’


완숙할 대로 완숙하고 번성할 대로 번성해 이제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게 된 악과 대면할 때 우리는 그 무력감 혹은 절망감을 일쑤 축원의 형태로 바꾸어 내뱉는다. 속된 말로 “잘 먹고 잘살아라” 쯤이 되는 그 축원은, 그러나 실은 가장 가혹한 저주이다. 너는 네 악 속에서 영원히 번성해라, 구원받을 수 없는 네 악 속에서 영원히 갇혀 있으라는.

민중과 저항의 보호막을 벗어던진 뒤에도 그의 번성은 계속됐다. 이미 말한 대로 이제 그를 다치게 할 칼은 없어 보였다. 그는 자랄 대로 자라 세상의 톱과 칼로는 잘라낼 수 없는 나무와도 같았다. 그도 그걸 잘 아는 듯 느긋함과 여유로 자신의 수확을 즐겼다.


그러다가 그 절망감과 무력감은 마침내 그의 악에 대한 엉뚱한 축원으로 변해 갔다. 이 악을 지울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에 없다. 그의 죄가 탕감 받을 수 있는 벌은 없다. 있다면 오직 하나 그가 자신의 악 속에서 영원히 번성하는 것이다. 자신의 악 속에 영원히 갇히는 일이다. 너는 너의 악 속에서 영원하라…….


소설은 어떻게 마무리되는가.


어쨌든 악령은 사라졌다. 그토록 오래 영험했던 그의 부적들은 힘을 잃었고 마침내 그는 사로잡혀 영원한 그의 감옥으로 끌려갔다. 근래까지도 나는 얼마나 자주 옛적의 엉터리 도통(道通) 이야기들에서처럼 그가 한순간에 수만 길 업화(業火)를 치뚫고 느닷없이 거룩한 천상으로 치솟는 상상에 가슴 졸여 왔던가.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악령은 자신의 악에 사로잡혔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자신이 저지른 악업 속에 갇혔다.


이 부분은 소설의 서두에 나오는 대목이지만, 결말이기도 하다. 거대한 악을 드러내고 응징하지 못해 조바심치던 화자는, 그러한 일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악령이 스스로 악에 더 갇히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응징을 대신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위대한 민족시인의 면모를 벗고 소시민으로 발이 묶이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제 악령이 비로소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통쾌해 한다.

이것을 응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문학적 응징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정의에 목말라하고 불의에 분노하는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는 여전히 행복하게 천수, 만수를 누리는 꼴일 뿐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응징이고 현실적 교훈이다. 우리가 함께 숨쉬고 사는 현실에서는 악령은 문학적 방식으로가 아니라 사회적 방식으로 사로잡혀야 한다. 그것이 훨씬 나은 결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 화자가 염원하고 조바심치고 절망하던 응징이 뒤늦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모두를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 소설 속 악령이 시인 고은과 고율로 싱크로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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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orthshore 2018/02/28 01:57 # 삭제 답글

    이문열의 이 소설을 읽은 기억이, 이 블로그를 보고서야 새삼 떠오릅니다. 세상의 변화,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 집단적 사회 의식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저 소설을 찾아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deulpul 2018/02/28 10:52 #

    많은 책을 읽으시고 또 소장하신 장서가이신데, 이 소설집의 초판을 가지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이젠 레어템이 된 데다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역사적 가치까지 생겨 버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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