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 녹듯 섞일雜 끓일湯 (Others)

내 마음에 들게 머리를 하는 미용실이 있다는 것은 행운. 그런 행운을 잡기는 쉽지 않습니다.

처음엔 동네를 다 돌아다녔습니다. 모두 한 번씩밖에 안 갔죠. 남자 머리 거기서 거기고 다른 사람 눈에는 별 차이도 없어 보이겠지만, 그래도 남자도 나름대로 취향이 있고 스타일이 있습니다.

동네를 떠돌다 결국 길모퉁이에 있는 소박한 가게에 안착했습니다. 홀로 가게를 하시는데, 일요일 하루 빼고 매일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여 아침 9시30분에서 저녁 8시30분까지 일하시는 분입니다. 이제 이 분과는 3주에 한 번꼴로 정기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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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는 사람들, 특히 남성은 현지인을 상대로 하는 뷰티샵, 바버샵 같은 델 잘 안 갑니다. 가면 머리 망해서 나옵니다. 두상이 다른 탓인지 감각이 다르기 때문인지, 아주 이상한 컷을 하고 나오게 됩니다. 한국식으로 머리를 자르는 가게에 대한 절망적인 수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한국 사람 웬만큼 있는 동네에는 꼭 한국 미장원이 있습니다. 주로 한국인(더 나아가 동양인)을 상대합니다. 정식 미장원이 없으면 야매로라도 있습니다. 그것도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장발 히피가 되어 있다가, 인근 대도시 나갈 때 가서 자릅니다. 한국 다녀갈 때 반드시 머리 하고 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한국 미장원이 좋은 또 한 가지 이유는 편하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물론 머리를 하시는 분이 원하지 않는데 대화 노동의 수고까지 더해드려선 안 되겠죠. 하지만 자주 다니며 단골이 되면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떠나기 전에 만났던 분은 저보다 더 대화를 좋아하는 분이었습니다. 하긴 심심하기도 하실 테지만, 얼마 안 되는 동안의 대화에서 얼마나 많은 정보가 오갈 수 있는지를 상기하면 매우 실용적인 태도이기도 합니다. 제가 또 착실하게 이야기를 잘 들어드리는 편이기도 하죵.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잘 되면 머리가 좀 이상해집니다. 대화에 신경쓰신 탓인지 오버 컷을 하시는 것인데...... 그래서 유달리 대화가 잘 되는 날이면 조마조마해집니다. 안경을 벗고 앉아서 머리를 자르기 때문에, 앞거울은 무용지물입니다. 어떻게 되어가는지 잘 모르고 있다가, 끝나고 안경을 다시 쓰고 나서야 충격을 받게 됩니다.

어느 날은 다른 이유로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외롭고 힘들었던 시기, 무슨 말끝에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걱정 마세요. 다 잘 되실 거에요. 나중엔 아 그런 때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에요."

제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표나게 꺼내놓지도 않았는데,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혜안이 생기는지 저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코끝이 찡해서 눈을 껌뻑껌뻑했습니다. 아, 누가 나에게 이런 위로의 말을 해 주었던가. 지나가는 말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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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가 되어버린 도봉


어제, 이제 단골이 된 길모퉁이 소박한 가게에 머리를 자르러 갔습니다.

"며칠 전에 눈 오는 것 보셨어요? 난 살면서 그렇게 큰 눈덩이는 처음 봤어요. 눈송이가 아니라 눈덩이더라니까요."

"그러게요. 참 복스럽게도 펑펑 오데요."

"그런데 많이 왔어도 하나도 안 쌓이고 금방 다 녹았죠."

"네, 다행이에요."

"안성 사는 어머니한테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가 그러시네요. 봄눈은 괜찮다, 원래 그런다. 그래서 봄눈 녹듯이란 말이 있는 거란다."

"아... 듣고 보니 정말 딱 맞는 말이네요. 봄눈 녹듯... 아니, 근데 게눈 감추듯이 더 어울리는 말 아니에요?"

"네, 하하. 봄눈 녹으면 게눈 감추듯 없어지기도 하겠죠."

머리는 이날도 마음에 들게 잘 나왔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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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8/03/04 11:36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8/03/07 23:16 #

    눈이 녹고 나서 더러운 것은 눈의 속성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눈이 아무리 정성껏 희어도, 한 켜만 벗기면 그 추잡한 본질이 드러나는 세상에 닿으면서 더럽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 northshore 2018/03/06 03:30 # 삭제 답글

    마음이 따뜻해지는 얘깁니다. 이민온 이후 20년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데, 다른 이민자가 집안에 '야매'로 꾸며놓은 미용실에서 두어 번 깎은 적은 있지만 현지 바버샵에 가서 머리를 깎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늘 아내가 깎지요. 한 달에 한 번쯤, 도저히 안되겠다 여겨질 무렵 아내에게 깎아달라고 합니다. 두 아이도 마찬가지... 큰 놈은 움직거려서 엄마가 다뤄야 그나마 가능하고, 작은 놈은 미용실이나 이발소에 보내도 되지만 그래도 엄마가 깎아줍니다. 요즘은 멋을 내려고 애쓰는 중이라, 뒷머리만 깎고 앞머리는 내버려두라고 주문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 deulpul 2018/03/07 23:18 #

    부인께서는 선수가 다 되셨겠군요! 해주신 말씀이야말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고, 제 건 피눈물 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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