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사를 하려면 고객부터 알아야 한다. 글을 쓰고 매체를 하려면 독자가 누구인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지금의 언론은 바로 이 출발점에서 일단 좌절하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
안수찬 기자가 쓴 <스트레이트를 넘어 내러티브로>에는 매체 기사가 도달하여야 할 독자가 모순된 요구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연구(유선영, '새로운 신문기사 스타일', 2001)에서 드러나는 독자의 모습을 간추리면 이렇다. -- 신문을 신뢰하지 않는다. 공정하거나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은 잘 읽지도 않는다. 다만 논조와 입장이 분명한 기사(또는 신문)을 좋아한다.
이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 신문에 대한 불신은 공정성에 대한 의심인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동시에 입장이 분명한 기사를 선호한단다.
현업 기자들이 현장에서 부딪히는 독자들의 요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논쟁을 즐기지만, 신문 기사의 편파성은 참을 수 없어 하는 반면, (기자를 비롯한) 뉴스 인물의 주관이 분명히 드러나는 글을 선호한다. 기자들이 보기에 독자들의 이런 태도는 대단히 모순된 것이다. 공정하게 기사를 쓰라는 것인지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것인지 종잡기 힘들다.
이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 신문에 대한 불신은 공정성에 대한 의심인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동시에 입장이 분명한 기사를 선호한단다.
현업 기자들이 현장에서 부딪히는 독자들의 요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논쟁을 즐기지만, 신문 기사의 편파성은 참을 수 없어 하는 반면, (기자를 비롯한) 뉴스 인물의 주관이 분명히 드러나는 글을 선호한다. 기자들이 보기에 독자들의 이런 태도는 대단히 모순된 것이다. 공정하게 기사를 쓰라는 것인지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것인지 종잡기 힘들다.
매체 독자의 요구는 파악하기도 또 충족시키기도 어렵다.
또 다른 모순이 있다. 같은 책의 내용이다.
신문으로부터 떨어져니가는 독자들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평면적인(그래서 편협하게 느껴지는) 현재의 스트레이트 기사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취재원을 기사 안에 가급적 많이 등장시켜야 한다. 그러면 기사의 절대 분량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독자들은 긴 기사를 좀체 읽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도 어렵다.
최근 메디아티 박상현 랩장이 미디어 변화 현장을 설명해주는 자리에 참석했다.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매체가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실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범하면서도 값진 진리가 아닐 수 없다.
매체의 실험은 단순히 독자에게 이르는 채널을 다양화한다거나 하는 선에서 그칠 성질은 아니다. 그건 누구나 다 하고 있고, 여전히 소모적이며, 성과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 미디어 세상 일각에서 벌어지는 실험은 글을 쓰는 방식, 더 나아가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시도다.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안도 그런 실험 과정에서 찾아질 것이다.
새로 등장하는 매체들은 실험을 본질로 하고 있다. 몸이 가벼워서 실패해도 데미지가 적다. 문제는 기존 매체다. 이들은 견고하고 육중한 낡은 틀과 몸에 붙은 관성을 깨고 탄력적인 실험을 하러 나설 수 있겠는가. 그 대답이 무엇이냐에 따라 많은 것이 분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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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자그니 2018/03/18 21:56 # 답글
deulpul 2018/03/19 2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