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여자 (再) 비칠映 그림畵 (Movies)

딱 3년 전, 나는 벼랑 끝에 서서 어두운 발밑을 내려다보며 아래 글을 썼다. 그 뒤 3년이 흘렀다. 시간은 절대적이고도 상대적이어서, 같은 3년이라도 사람마다 다른 양으로 체험되고 기억된다.

나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

3년 전 생각을 하다, 문득 옮겨 왔다. 갑자기 이 글을 떠올리게 된 구체적인 이유도 있다. 그건 다음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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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세상이 달라진다. 무심하게 뜨고 지던 해가 갑자기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하고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나뭇잎들조차 행복해 하는 것 같다.

사랑을 하면 세상이 달라진다. 무심하게 뜨고 지던 해가 갑자기 나를 저주하기 시작하고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나뭇잎들조차 슬퍼하는 것 같다.

물 같이 담담한 사랑이 있는가. 상선(上善)은 물과 같을지 몰라도, 사랑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특히 그 시작의 즈음에서 대개 열렬한 환희를 주거나 격렬한 고통을 준다. 아니, 담담히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여울물이 그 속에서 바위나 자갈과 쉼없이 부딪치며 아파하는 것을 생각하면, 사랑은 흐르는 물 같은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한 여자 때문에 세상의 꼭대기에 올랐다가 가장 밑바닥으로 처박혀 상처를 입은 시어도어는 사랑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상대가 어떤 존재이든 말이다.




영화 <그녀>를 보고 난 첫 느낌은 이야기가 매우 현명하게 쓰였다는 것이다. 줄거리도 그렇고, 생각을 하게 이끄는 현명한 대사와 장면이 구석구석 가득하다. 무엇보다, 사람을 파헤쳐 사랑을 더듬는 촉수의 움직임이 매우 섬세하고도 현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계는 마음을 의존할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은가? 절실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시어도어의 이혼녀 같은 사람이 보자면,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남자의 한심함의 또다른 표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맨서 같은 OS가 살고 있는 컴퓨터가 있다면 나는 당장 샀을 것이다. 이상한 짓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몸이 추운 사람에게는 따뜻한 체온을 가진 존재가 필요하겠지만, 마음이 춥고 시린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존재가 필요하다. 마음을 기댈 등을 내어주고 데워주고 북돋워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그들에게는, 그 존재가 남자든 여자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심지어 기계든 컴퓨터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어도어는 그렇게 데워주고 북돋워주는 존재를 만나 울다 웃다 한다. 이것이 한 판의 진지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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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많은 남성에게 이상이 되어온 것은 <신곡>의 베아트리체다. 알리기에리 단테를 이끌어 천국을 보여준 그 투어 가이드 베아트리체 말이다. 그녀가 수백 년에 걸쳐 남자들의 이상이 되어 온 것은 그저 아름답다거나 섹시하다거나 지성미가 뛰어나다거나 해서가 아니다. 베아트리체는 단순한 애정의 대상이 아니라, 소심하고 모자라서 세상에 서툴고 스스로 서지 못하는 남성의 지리멸렬한 인생을 보듬어 이끌어주는 구원의 여성상이다.

남자는 본질적으로 구원이 필요한 존재인 것 같다. 혼자 놔두면 대책이 없어진다. 이것은 출세를 했다든가 돈이 많다든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남자들은 원초적으로 불완전한 반편이들에 가깝다. 여자들은 외톨이라도 불활성 기체처럼 뭔가 스스로 충만하여 안정하는 것 같지만, 남자들은 전자 몇 개 빠진 양이온처럼 늘 불안하게 부유하면서 어디든 결합하려 한다.

이렇게 불안하고 부유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설령 지옥은 아니더라도, 천국이 아님도 분명하다. 이런 남성성을 이끌어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베아트리체이지 않던가.

<그녀>에서 외로운 시어도어가 서맨서와 친해져 가는 과정은 구원을 얻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맨서는 그가 시킨 일과 시키지 않았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수행하면서 시어도어의 인생을 정리한다. 이것은 구원이랄 것까지는 없다. 근면한 비서 정도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녀가 구원인 것은, 시어도어가 그녀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서맨서는 응달에서 시들어가는 외떡잎 식물처럼 늘 비실비실한 시어도어의 무료함 속에 감춰진 열정과 가능성을 알아채고 이를 끄집어냄으로써 시어도어가 세상으로 나설 수 있게 만든다.

여기서 나는 또 하나의 구원의 여인, 또 하나의 베아트리체, 베아트리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앞니가 뻥 뚫린 특이한 여자 베아트리스 달. 물론 배우로서가 아니라 베티 블루라는 극중 인물로서지만 말이다.




그녀를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가. 늘 남들보다 체온이 몇 도는 높은 여자. 자신의 속에서 솟아나는 격렬한 정서를 스스로 다루지 못해 늘 폭발하고 나서야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여자. '사랑하다 미쳐버려라'라는 말이 실제로 구현되는 인생이 있다면, 베티가 그랬다.

그러나 내가 베티를 사랑해왔던 것은 그런 성격 때문은 아니다. 본인도 확신하지 않는 남자의 재능을 직관하고 이를 무한히 신뢰하며, 그 무기력함 속에서 재능을 발라내어 결국 개화시키고야 마는, 지옥과 연옥을 서성이다 온 단테를 이끌고 천국으로 데려가는 베아트리체 같은 일을 베아트리스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영화니까 내용을 조금 자세히 말해보자. 여자 베티와 남자 조그는 싸우는 중이다. 남자가 자존감도 없이, 등신 같은 상관에게 찍소리도 못한다고 여자가 화가 났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베티 때문에 벌어진 일이어서 조그도 할 말이 아주 없지는 않다. 이런 갈등은 실제 일상에서 아주 흔하게 벌어진다.

화가 난 베티가 살림을 내던지기 시작한다. 상자 하나에서 하드커버 공책이 와르르 쏟아진다. 이게 뭐야? 아무 것도 아니야. 네가 이거 다 썼어? 아냐, 그냥 쓰레기야.

베티는 싸우다 말고 공책에 씌인 글을 읽기 시작한다. 탁자 위 잡동사니를 와르르 밀어버리고 공책을 쌓아둔 뒤 읽는다. 계속 읽는다. 밤에도 읽고 새벽에도 읽고 아침에도 읽고 낮에도 읽는다.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읽는다. 이렇게 공책 스물 다섯 권(내가 화면을 세워놓고 헤아려 보았다)에 빽빽하게 적힌 글을 하루 밤, 하루 낮 동안 다 읽었다.

출근하기 전에 조그는 열 살 어린 여자 베티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때, 네 맘에 들어? 베티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다. 열 아홉 살 여자가 그 어떤 편집자보다 더 어른스럽다.

이 날부터 조그는 베티에게 작가가 되었고 천재가 되었다. 설령 그가 작가로서의 재능이 없고 천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여자가 그렇게 믿기 시작하는 순간, 남자는 작가고 천재다. 베티가 말한다. 당신은 당신을 몰라요.

그 날,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조그에게 베티가 했던 일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녀는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였으며, 온몸이 먼지와 페인트 범벅인 조그를 이끌어 의자에 앉히고 포도주를 따라준다. 조그가 계속 묻는다. 대체 무슨 일이야? 베티는 말한다. 가만히 있어요. 나, 당신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나는 이 장면에서 갑자기 한 남자를 존경하게 된 여자의 사랑이나 경외 같은 감정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인문적 세계에 대한 경건한 숭배 같은 것도 읽게 된다. 어느 쪽이든, 볼 때마다 코가 찡해지는 장면이다.

남자가 말한다. 꿈 같아. 꿈 맞다. 많은 반편이 남자들의 꿈이다.

이후 베티는 조그의 허접쓰레기 같은 글(조그의 생각이다)에 헌신적으로 매달린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베아트리체 같은 베티의 손에서 조그의 인생이 새로 빚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여성이 하는 일이란 대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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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아니면 현명하거나 환상을 가진 여자들은 원래 그런 것인지, 서맨서도 똑같은 일을 벌인다. 시어도어의 컴퓨터 속에서 쓸모 없는 편지글(아마 시어도어의 생각일 것이다)을 찾아내고 추려서 출판사에 보낸다. 그 값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시어도어가 말한다. 정말이에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들이 내 편지를 출판한다는 게 사실이에요? 서맨서가 웃으며 말한다. 안 그런다면 그게 멍청한 거죠.

서맨서가 한 일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재능이 세상과 마주칠 일을 두려워하는 남자에게 자존의 기저귀를 채워주고 자신감의 옷을 입혀준 베티와 똑같다. 차이라면, 베티는 뜨겁고 격정적인 아날로그 감성으로 조그의 글을 평가했을 테고, 서맨서는 아마 빅 데이터에 근거한 차가운 디지털 분석의 시각으로 시어도어의 글을 평가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녀>에서 이 부분은 <베티 블루>에서만큼 결정적인 뼈대는 아니다. 그저, 시어도어와 서맨서의 사랑이 최정점에 올라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만 해 두자.

시어도어가 말한다. 미안해요, 내가 대체 어디가 잘못인지 모르겠어요. 서맨서에게는 미안해 해도 되지만 남자들끼리는 그럴 필요 없다. 다 마찬가지니까. 서맨서가 말한다. 나는 당신이 늘 어떤 두려움을 갖고 산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그로부터 벗어나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더 이상 그렇게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시어도어가 천천히 말한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물론 시어도어는 서맨서의 얼굴이나 몸매를 본 적이 없다. 역시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이다.

그래서 시어도어에게 서맨서는 OS가 아니라 분명한 여자이고, 그저 여자가 아니라 구원의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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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남자의 시각에서 썼다. <그녀>의 원 제목이 'She'가 아니고 'Her'인 데서 드러나듯이 영화는 남자의 시각에서 흐르고, 나도 그런 흐름을 따라왔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고 남자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한다. 이것은 성 편견이나 전통적인 성 역할 의식이 반영된 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누구나 두 가지 경향을 모두 가졌을 테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 해도 그것은 정도의 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들은 성별 가름없이 약간의 보편성 같은 것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영화 <베티 블루>의 원 제목은 <37° 2 le matin>, '아침에는 37.2도'라는 뜻이다.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겼는데, 원작을 쓴 소설가 필립 자(Philippe Djian)는 무명이었으나 이 영화가 뜨면서 함께 유명해졌다. 지금까지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해오고 있고 대중적으로도 성공했지만, 프랑스 비평가들에게는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37° 2 le matin>의 성공도 원작을 대폭 뜯어고쳐 시나리오를 쓰고 이미지로 구현한 감독 장-자크 베넥스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이 많다.

현명한 영화 <그녀>는 감독 스파이크 조운즈가 시나리오까지 썼다. 영화의 근본부터 훌륭하지만, 시각적인 상대역이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며 환희하고 고통받는 남자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준 호아킨 피닉스는, 배우란 진짜 징그러운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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