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신뢰하는 실수 섞일雜 끓일湯 (Others)



미국 연방수사국(FBI) 소속 심리분석관으로, 오랫동안 극악한 살인자들을 면담하며 그들의 심리를 분석해왔던 프로파일러 로버트 레슬러는 다음과 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자신의 부모를 포함해 10명을 죽인 뒤 일곱 번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재소자와 면담할 때 일이다. 레슬러는 이미 두 차례 그와 면담을 한 바 있다. 재소자와는 어느 정도 친밀감이 생겼다. 이 두 번의 면담은 모두 동료 요원과 함께 진행했다.

살인범과 친해졌다고 생각한 레슬러는 세 번째 면담 때는 혼자 갔다. 폐쇄공포증이 일어날 정도로 철저히 봉쇄된 특별 감방 안에서 면담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 말고 배석자는 아무도 없었다. 레슬러와 살인범은 네 시간 동안 범죄와 관련한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윽고 마무리가 되어, 레슬러는 면담이 끝났음을 교도관에게 알리는 벨을 눌렀다. 그런데 교도관은 오지 않았다. 짐짓 무관심한 척 대화를 계속하며 몇 분 뒤 다시 벨을 눌렀다. 역시 교도관은 오지 않았다.

레슬러는 베테랑 요원이었으나,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폐쇄된 공간에 함께 있는 사람은 연쇄 살인범이고, 그가 한 사람쯤 더 죽여봐야 손해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두려운 기색을 감추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났다. 재소자가 말했다.

"교도관이 어디 간 모양인데, 다시 오려면 적어도 15분은 걸릴 거요. 내가 여기서 난장판을 만들기로 하면 당신은 곤란해지겠지? 당신 머리통을 잡아뜯어서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가 교도관한테 보여줄 수도 있다구."

재소자는 키가 2m가 넘었고 몸무게도 135kg에 이르는 거구였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방해자가 아무도 없는 이 공간에서 무장하지 않은 보통 체구의 FBI 요원 한 명쯤 죽이는 것은 식은죽 먹기일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레슬러는 뼈저린 각성을 하게 된다. FBI에서 요원들을 가르치는 교관이기도 한 그는, 학생들에게 기본 중의 기본으로 강조하던 스톡홀름 신드롬에 어이없게도 그 자신이 빠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살인범과 친밀해졌다는 생각에서 나 자신을 살인범과 동일시하여 상대를 신뢰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드러내지 못할 공포 속에 진땀을 흘린 레슬러는 그 뒤 무슨 일이 있어도 홀로 범죄자를 면담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교도소에서 범죄자를 면담할 경우 복수의 요원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FBI의 원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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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변 환경으로 인해 사랑이 잘 안 될 때, 함께 죽기도 한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연사(戀死)는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둘이 현해탄에 빠져 죽었다'고 알려진 극작가 김우진과 가수 윤심덕의 사연일 것이다.

어떤 연인이 비슷한 이유로 함께 죽기로 합의하였다. 두 사람은 고층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키스를 나누고, 이윽고 한 사람이 난간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뛰어내리지 않았다. 그 사람은 막상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너무나 두려웠고, 이윽고 갑자기 자신의 인생이 소중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스스로에게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생각한 자기애, 일찌감치 버렸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던 생존 욕구, 이미 떨어져내린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말하지 않았던 이기적인 욕망... 이런 것들이 순식간에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몰려온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죽지 않았다. 죽지 않음으로써 죽은 사람을 배반했다.

먼저 뛰어내린 불쌍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상대를 신뢰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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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옥자>와 <다운사이징>은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구 생태계를 위협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해결 방식은 정반대다. 옥자는 음식의 사이즈를 키우고, 다운사이징은 사람의 사이즈를 줄인다.




아무리 특혜가 크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몸을 2,744분의 1로 불가역적으로 축소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이런 모험은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진정으로 지지하고 신뢰하기 전에는 감행하기 어렵다.

폴과 오드리 사프라닉도 서로에게 그런 지지와 신뢰를 갖고 있었다. 서로를 적절히 사랑하는 이 부부는 낯선 환경에서 작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유복한 새 인생을 살기로 약속하고, 이윽고 축소 시술대에 올랐다. 그런데 시술 과정은 남녀 시설로 구분되어 진행되므로 두 사람은 잠깐 이별하게 된다.

오드리가 마지막 순간에 배신을 하여 시술을 받지 않았고, 작은 인간이 된 것은 자기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폴이 분노하고 절망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함께 시술받기로 한 아내의 소재가 파악이 안 되어 걱정하는 폴에게 전화가 온다.)

폴: 여보세요?

오드리: 폴?

폴: 오, 오드리, 다행이야. 지금 어디야?

오드리: 화내지 마. 제발 화내지 마. 너무 힘들어.

폴: 뭐가 힘들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오드리: 폴, 그 사람들이 내 머리를 박박 밀고 눈썹도 밀어버리려 하잖아.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나 친정식구들도 떠날 수 없고 친구들도 떠날 수 없어. 미안해, 폴. 난 못 하겠어.

폴: (멘붕) 당신 지금 어디야? 지금 공항인 거야?

오드리: 나 미워하지 마.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마.

폴: 알았어, 알았어. 침작하구, 택시를 타고 이리 와서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자.

오드리: (침묵)

폴: 아니... 당신 지금 나를 여기 두고 떠나겠다는 거야?

오드리: 내 기분이 지금 어떤지 이해가 안 돼? 끔찍하다구. 당신을 실망시켜서 너무 미안한 기분이야. 근데 이런 걸 깨달았어. 내가 축소 시술 받기로 한 것은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려던 것임을 말야. 난 좀더 내 자신 위주로 생각했어야 했어.

폴: 니 자신 위주로 생각을 한다구? 니 자신 위주로? 당신은 지금 내가 어떤지 한 마디 물어보기나 했어?

오드리: 고함치지 마. 소리지르면 끊어버릴 거야.

폴: (증오) 당신 오늘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쥐꼬리만큼이라도 이해하는 거야? 오드리, 당신 지금 당장 이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오드리: 조막만해진 당신을 보러 오라고? 난 이미 미칠 것 같다구.

폴: (분노로 고함친다) 미칠 것 같다구? 응? 미칠 것 같아? 지금 15센티미터로 줄어든 사람은 나라구!!


함께 꿈을 추구하기로 했다가 일방적으로 배신당하고 홀로 돌이킬 수 없는 곳에 내팽개쳐진 사람들은 대개 이런 심정을 갖게 되는 것 같다.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위해 계획된 폴과 오드리의 모험은 결정적 순간에 이루어진 이기적인 배신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고, 폴의 인생도 엉망진창이 된다.

이것은 폴에게는 공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합당한 징벌 정도는 될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상대를 신뢰한 실수에 대한 처절한 징벌이라고나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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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8/04/13 10:1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8/04/13 21:37 #

    맞습니다. 천성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있지요. 남을 쉽게 잘 믿는 사람이랄까요... 이것은 미덕으로 칭송되어야 옳겠지만, 사회자본 수준이 현저히 낮은 데다 남을 속이고 자기 잇속을 차리는 것이 지혜로 간주되는 세상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그렇게 선한 사람들, 그렇게 남을 믿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이 세상이 살만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 자그니 2018/04/13 10:27 # 답글

    ... 알면서도 무섭죠. 그렇다고 나는 인간은 원래 그러니 너도 믿지 않아...라고 할 수도 없고... 최악까지 믿을 사람이 있는 걸까요. 503 비서...들도 울면서(?) 배신하는데요...
  • deulpul 2018/04/13 21:48 #

    어려운 문제긴 합니다만,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손쉽고 가장 효과적인 접근 방법은 거꾸로 '최소한 나는 그렇게 신뢰를 저버리고 배신하는 인간이 되지 않겠다'라는 결의가 보편화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의 배반 같은 것은 예컨대 범죄 모의에서의 배반과는 결이 달라서, 게임이론 같은 것으로는 풀이할 수 없는 성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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