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찍히지 않은 군항제 사진 섞일雜 끓일湯 (Others)

진해에서 열리는 군항제는 벚꽃 잔치입니다. 하지만 이 도시의 벚꽃이 군항제 기간에 최전성기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벚꽃과 군항제가 잘 맞아떨어질지는 오로지 운이 결정합니다. 군항제 기간이 매해 4월1일~10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오랜 기간 추이를 살펴 날짜를 잡았을 것이므로, 벚꽃 만개 시기와 군항제는 대체로 잘 맞습니다.

이 기간에는 전국에서 (그리고 요즘은 외국에서까지) 엄청난 인파가 이 항구 도시에 몰려옵니다. 진해의 명소들은 인산인해가 됩니다. 구경을 하려 해도, 밥을 먹으려도, 차를 마시려도, 화장실을 가려 해도 긴 줄을 서야 합니다.

저도 한번 가봤습니다. 56주년을 맞는 전통의 축제인 군항제가 어떤 양상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꽃으로 유명한 낯선 도시에서 꽃그늘 아래 천천히 거닐어보고도 싶었습니다. CNN이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로 꼽았다는 50곳 중에 두 개가 들어 있는 진해.

그러나 문제는 인파를 피하는 것. 군항제 기간에 진해에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0. 프롤로그

교통편은 여행사에서 내놓은 '무박1일' 상품을 이용했습니다. 직접 운전하여 가는 것보다 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찌된 일인지 교통비도 고속버스보다 훨씬 저렴했습니다. 딱 필요한 정도의 안내만 해주는 센스 있는 가이드가 동반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새벽에 현지에 도착하여 오전 시간대에 돌아볼 수 있으므로 군중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습니다. 같은 경로라도 당일 관광이나 역무박 관광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특혜지요.




밤 11시30분 서울 출발입니다. 관광버스는 고속버스보다는 좌석이 좁아 조금 불편합니다. 하지만 함께 간 사람과 거리를 좁혀 친밀해지는 데는 더 좋기도 합니다.

좌석은 너댓 자리를 빼고는 모두 찼습니다. 버스는 진해에 도착하면 아무런 규제 없이 사람들을 풀어놓을 것이고, 마음껏 돌아다니다 오후에 정해진 시간까지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제가 다녀볼 곳은 순서대로 [경화역 - 여좌천 - 생태공원 - 제황산 공원 - 해군사관학교] 입니다. 이 정도면 벚꽃으로 유명한 진해 명소를 다 훑어보는 셈입니다. CNN 50곳에 들어 있는 경화역과 여좌천도 포함됩니다.

이 경로는 택시나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특별히 몸이 불편하지 않으면 걸어도 괜찮은 정도입니다. 저도 다 걸어다녔습니다. 다만 경화역은 벚꽃 중심부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서 뭔가를 타야 합니다. 저희는 관광버스가 데려다 주었습니다.




새벽에 문을 연 콩나물국밥집에서 아침밥부터 든든하게 먹고 도시 여행을 시작합니다.

1. 경화역

진해역 바로 전의 철도역으로, 이제는 쓰지 않는 폐역입니다. 벚꽃 철길로 유명한 곳. 새벽이라 인적이 적어 고즈녁한 분위기를 느끼며 산책 같은 구경을 하였습니다.

경화역 뒷편은 고층아파트입니다. 작년이나 재작년 군항제 때 이곳을 왔던 사람들은 낯설게 느낄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하루가 다르게 건물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경화역 사진을 잘 찍으려면 이제 인파뿐 아니라 아파트도 열심히 피해야 합니다.

벚꽃 터널 밑 철로 위에는 기관차와 한 량의 객차로 구성된 열차가 서 있습니다. 예전에는 천천히 움직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시용으로만 활용되는 듯 고정되어 있습니다.






2. 여좌천

진해의 중심지를 흐르는 개울인데, 진해여고 옆쪽으로 복개가 되지 않은 약 1.5km 구간이 명소입니다. 나이가 꽤 든 벚나무들에서 엄청난 양의 벚꽃이 피어납니다. 개울 바닥과 주변 길은 모두 공사를 해서 정리를 해 두었습니다. 잔뜩 들어찬 인공 장식물들이 경관을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긴 했습니다.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너댓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드라마에 나왔다는 '로망스 다리'입니다. 연분홍 그늘 밑 다리 위에서 어떤 로망스가 벌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역시 새벽이라 관광객은 거의 없었고 아침 산책을 하는 동네 주민 몇몇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드물어서 좋긴 했지만 빛이 약해 사진이 잘 안 나오는 것은 안 자랑.

여좌천은 뭔가 아련한 사연을 가지고 있을 듯한 예쁜 이름이지만, 그냥 이 동네가 여좌동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여좌동은? 옛 지명인 여명리와 좌천리의 앞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어머, 실망이야. 세계적인 꽃동네의 이름이 그렇게 밋밋한 연원을 가졌다니.






여좌천 근처에는 진해역이 있습니다. 진해선 철로의 실질적 종점인 진해역은 바로 앞의 경화역과 마찬가지로 문을 닫은 폐역입니다. 한때 사람이 붐볐을 역앞 광장은 진해 시내를 돌아보는 2층 셔틀버스인 '창원 체리블라썸' 버스의 기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3. 내수면 환경생태공원

여좌천 산책길의 끄트머리쯤에 있는 널찍한 자연 공원입니다. 커다란 호수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주변 나무들도 예쁘고 호수에 비치는 두런두런한 산록도 절경입니다.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과 새로 솟아나는 꽃과 싹이 다 풋풋하였습니다.






4. 제황산 공원

제황산은 진해 시내 가운데에 있는 산입니다. 번화한 시장 거리를 지나면 가파른 계단의 모양으로 눈앞에 불쑥 나타납니다. 날것의 높은 장소에 익숙하지 않은 제게는 상당히 위압적입니다. 산을 오르는 계단은 365개라서 '일년 계단'이라고 합니다. 옆에는 모노레일이 있어서 이것을 이용해도 됩니다만, 저는 천천히 1년을 밟아 올라갔습니다. 계단을 헤아릴 필요는 없습니다. 중간중간에 숫자가 적혀 있지요.





모노레일이 산을 오르는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량이 붙어서 움직이는데, 손님은 뒤에만 타고 있습니다. 동영상이 중간에 흔들리는 것은 모노레일에 탄 아이들이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어서 거기 응해주었기 때문입니다.





15분 정도에 365일을 다 살고 정상에 오르면 흰색 진해탑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여기에 꼭 올라가야 합니다. 자유롭게 개방되어 아주 마음에 드는 분위기인 탑 건물에 들어가면 엘리베이터나 계단으로 8층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각 층의 난간에서는 벚꽃으로 수놓인 진해 시가지와 먼 봄바다까지 모두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수동 파노라마... 누르면 커집니다.


진해탑 건물 주변에서 직원 아저씨가 눈처럼 흩날린 벚꽃잎을 천천히 쓸고 있었습니다. 빗자루에 봄이 쓸리는 모습을 벤치에 앉아서 한참 구경했습니다. 탑 건물에 대해 물었더니 친절한 안내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여러 모로 아주 분위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5. 해군사관학교

진해 시내 남쪽으로 해사와 해군 기지가 함께 있는데, 군항제 때에만 개방합니다. 보통 군부대는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우가 많지만, 진해는 군항답게 군 시설이 시가지와 같은 문화권으로 느껴질 정도로 인접해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군부대는 공원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정문 쪽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가 정해진 곳만 둘러볼 수 있습니다. 기지 안의 가로수 벚꽃도 절경입니다. 이 날은 마침 청해부대 함정이 귀항하는 날이라서 환영 행사가 열렸고 승선 장병들의 가족도 많이 찾아왔습니다. 현역 구축함인 강감찬함을 공개하여, 함정에 올라 안팎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 촬영은 금지. 해사 쪽에는 거북선에 인파가 많이 몰렸습니다.









이렇게 죽 둘러보고, 벚꽃 그늘 아래 있는 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시가지 한가운데, 고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서 있는 1952년산 이순신 장군의 동상까지 알현했습니다. 걸린 시간은 6시간, 걸은 거리는 모두 8km 정도입니다. 버스가 기다리는 여좌천으로 돌아오니 한 시간 가량 남아, 근처 파스쿠찌에서 차를 한 잔 하며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내 도보 여행을 출발한 새벽에는 우리 차 한 대뿐이었는데, 지금은 길가에 관광버스가 한가득입니다. 그냥 길거리에 두 겹, 세 겹으로 주차를 합니다.





버스는 오후 2시30분에 출발하여 서울에는 저녁 7시 정도에 도착했습니다.

아름다운 봄도시 진해를 축제 기간임에도 조용하고 한적하게 둘러볼 수 있었던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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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Evermarquez 2018/04/21 08:17 # 삭제 답글

    다른 지역으로도 하루 코스 여행 상품이 많은 가 보던데 찾아본 적은 없어요. 여유를 진지하게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다는 걸 알겠습니다. 내년 벚꽃 전에는 이 글을 링크해주시길요!
  • deulpul 2018/04/21 10:44 #

    저도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목적지에 따라 약간 다르겠지만, 이번 경우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발생하는 불필요한 경로와 경비를 줄일 수 있고 자유여행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꼭 기억해 두었다가 내년에 소환하겠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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