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씹어먹기 씹어먹기 중매媒 몸體 (Media)



한두 달 전에 블친이 환기시켜 주셔서 꼼꼼히 보게된 책 <미디어 씹어먹기>. 미국 언론인 브룩 글래드스톤이 미디어 비평적 관점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 책이다. 전체적으로는 비판으로 시작해서 낙관으로 나아가는데, 미디어 역사의 궤적이 그녀로 하여금 이러한 낙관을 가지게 하는 이유가 되는 듯하다. 확실히, 하늘 아래 새로운 것(문제)은 없다거나, 무엇무엇은 2천 년 전부터 막장이었다거나 하는 인식은 상당한 위안감을 준다.

이 책은 만화다. 재미를 목표로 하는 만화도 있지만, 무게 있는 주제를 만화의 형태로 만든 경우, 그 이유는 십중팔구 주제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쉬운가? 나는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 매우 애썼다는 말로 그 대답을 할 수 있겠다. 물론 제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지 말입니다. 하지만 만화라고 설렁설렁 통독하기가 불가능한 책임은 분명하다.

왜 이 만화책을 읽어내기가 어려운가?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1. 불친절한 정보 과부하

이 책은 현대 미디어가 처한 다양한 현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그리스, 로마로부터 내려오는 미디어의 역사도 담았다. 중간 이후는 미디어를 둘러싼 인간 심리 현상에 대한 연구들도 잔뜩 들어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무거운 주제들이다.

그러나 만화라는 형식에 담았기 때문에, 각 사항들이 충분한 설명 없이 극단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해당 주제와 관련한 대표적인 연구, 대표적인 학자나 언론인의 말 같은 것을 말풍선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잡아 넣은 결과다. 예컨대 이런 장면이다.


캐스 선스타인이 쓴 272쪽짜리 책 <리퍼블릭닷컴 2.0(Republic.com 2.0)>에 나온 내용이 한 컷에 들어갔다.

더 곤란한 문제는 이 책이 만화임에도 스토리의 구조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상당한 두뇌작용을 강요하는 아이템들이 유기적 관련 없이 나열형으로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마치 프리젠테이션 준비 자료를 발표자의 설명 없이 보는 양상이다. 굵직한 이론과 연구가 살이 다 발라진 뼈다귀의 형태로 쏟아져 나와, 뼈와 뼈끼리 부딪치는 소란스러운 지점들을 고통없이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이런 문제는 책 뒤에 붙인 206개의 미주(endnote)가 웅변한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자료들이 몇 단어씩으로 축약되어 본문의 그림 속에서 숨가쁘게 명멸한다. 저자가 많은 공부를 바탕으로 하여 책을 쓴 것은 존경스럽지만, 이런 온축을 만화라는 형식으로 제시한 것은 의도만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책은 겉만 쉽고 속은 어려워, 마치 맨손으로 게살을 파먹으라는 것 같다.

책에는 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무관심과 무기력이 생긴다는 연구 내용이 두 컷의 만화로 제시되고 있다(155쪽). 글래드스톤은 정보 과부하 상황에서 수용자가 이슈를 파악하고 결정을 내리기가 오히려 어렵게 된다는 연구도 함께 옮겨 놓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2. 미국 중심적 서술

이 책이 의도한 원래 독자, 즉 미국 독자들이라면 비교적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책에 제시된 미디어의 역사나 현실, 문화적 배경, 구체적인 사례 등이 대부분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인에게는 상식적인 것들일지 몰라도 한국인에게는 새로운 이야기이다. 따라서 그런 상식을 기저에 깔고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윗그림에서 우드로 윌슨 대신 이승만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영화 <76년의 정신> 대신 <오! 꿈의 나라>가 등장했더라면 한국인인 우리는 훨씬 쉽게 이해하였을 것이다. 보통 책이라면 각주로 설명이라도 붙일 텐데, 역시 만화라서 배경 설명을 넣을 곳이 없다.

꼭 미국 이야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배경 지식이 있어야 그림이 이해되는 부분이 많은데, 그런 내용을 모두 생략하고 있으므로 왜 그런 표현으로 그려지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림이 텍스트 서술을 보조하려고 시도한 장면조차 아무 설명이 없어,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는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 된다



이 장면은 영화 <혹성 탈출> 시리즈의 첫 작품인 1968년작 <혹성 탈출>의 마지막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다. 인류 멸망을 암시하는 충격적인 장면이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그런 인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미지로도, 또 텍스트와의 연관성에서도 별 의미가 없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위 장면에 쓰인 그림은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에서 가져온 것이다. 원그림이나 그에 대한 (이를테면 푸코의) 해석 같은 데 친숙하지 않으면 이 컷의 그림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를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배경 지식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렵고 무의미한 표현들이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3. 요령부득 번역

한국 독자가 특히 이 책을 읽어내기 어려운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어디 가겠습니까, 번역 문제.

명백한 오역, 맥락을 무시한 기계적 번역,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만의 옮김 같은 것들이 책 내용의 이해를 꾸준히 방해한다.

아마존닷컴에서 원서 앞부분 미리보기로 볼 수 있는 부분만 대조해 봐도 그 양상을 잘 알 수 있다.


별다른 고민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사실과 견해만으로 적절히 버무려놓은 전문가들의 의견에 길들여져 있는 거죠. (9쪽)

(원문) We marinated in punditry seasoned with only those facts and opinions we can digest without cognitive distress. '이런저런 사실과 견해'가 아니라, 생각의 불편함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나 의견만을, 전문가 의견을 곁들여 소비하는 데 익숙해 있다는 말이다.

난도질당하는 지역 기사, 뒤틀린 해외 기사 (9쪽)

(원문) scarifying local coverage, shriveled foreign coverage 이 말은 미국에서 매체 환경이 어려워지면서 긴축 운영을 하다 보니 지역 소식이나 해외 소식 취재와 보도를 줄이는 현실에서 나온 말이다. 이를테면 해외 특파원은 갈수록 줄어든다. 갑자기 왜 지역 기사가 난도질당하고 해외 기사가 뒤틀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shrivel에는 뒤틀린다는 뜻이 없다. 잘려나가는 지역 기사, 쪼그라드는 해외 기사.

한때 막강했던 게이트키퍼들은 이제 두려움에 싸인 시선으로, 명백하게 비전문적인 웹사이트들이 순진한 아이디를 앞세워 악의적인 거짓말을 일삼으며 미디어의 영역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입니다. (9쪽)

(원문) The once mighty gatekeepers watch in horror as libelous, manifestly unprofessional websites flood the media ether with unadulterated id. 번역투는 둘째치고, '순진한 아이디를 앞세워 몰려든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번역자는 원문의 'id'를 인터넷에서 쓰이는 닉 같은 아이디(ID, identity)로 해석했으나, 여기서는 인간의 본능적 자아를 의미하는 '이드'를 말한다. 갑자기 왜 아이디가 나왔는지 맥락을 따져보지 않더라도, 왜 소문자로 썼는지 의문을 가졌으면 이런 번역은 안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수없이 많은 파국과 선거들, ... 을 취재하는 저널리스트들을 지켜봤습니다. (10쪽)

(원문) But I've watched journalists cover countless catastrophes, elections, ... '파국'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누굴까.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는 파국이 아니라 지진이나 화재 같은 재난을 뜻한다.

뉴스의 지배적인 쟁점들을 중심으로 대중의 여론이 모이는 것도 확인했죠. 그러니 통제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0쪽)

(원문) I've seen how public opinion coalesces around the issues dominating the news, and I can tell you that no one is in control. 번역대로 대중 여론이 지배적인 쟁점으로 모인다면, 여론은 통제받는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모순되어 말이 안 됨에도 그냥 단어를 (그것도 잘못) 늘어놓은 것이다. 원문은 '나는 여론이 뉴스에서 두드러진 이슈를 중심으로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지켜보았는데, ('그러니'가 아니라) 그 결과 ('통제받는 사람'이 아니라) 통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말이다.

최초의 사례는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되고 4년이 지난 후, 영국에서 발생했죠. (11쪽)

(원문) The first known case occurred in England three years after French royals Louis XVI and Marie Antoinette lost their heads. 'three years after...'가 왜 '4년이 지난 후'로 둔갑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한국어 번역이라서 한국식 나이 따지기(?)로 계산을 했던 것일까.

정신 현상에 나타나는 모든 왜곡의 기저에는 위장된 환상의 출현이나 재출현에 저항하여 의식적으로 자아를 보호하려는 방어적 심리 과정이 있다. (15쪽)

(원문) Underlying every distortion of a psychic phenomenon, there is a defense mechanism which has as its aim the protection of the conscious ego against the appearance or reappearance of undisguised fantasies. 맨 마지막의 'undisguised fantasies', 즉 노골적인(위장되지 않은) 환상이 '위장된 환상'으로 거꾸로 번역되어 있다.

1922년 월터 리프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했던 일만 아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그 말에 진정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남에게 전해본 적이 없는 사람만 돌을 던져라." (18쪽)

(원문) Back in 1922, Walter Lippmann wrote... "Let him cast a stone who never passed on as the real inside truth what he had heard someone say who knew no more than he did." 이 부분은 월터 리프먼이 쓴 고전 <여론(Public Opinion)>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거짓에 휩쓸리고 그런 거짓을 전파하는 데 기여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부분이다. 번역문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 의미는 '누군가가 자신이 경험한 것 이상은 모르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그게 진실이라고 여겨 남에게 전파해 보지 않은 사람만 돌을 던져라'라는 것이다.

어떤 보도가 모순되거나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원본 문서를 읽어보거나 미심쩍은 정보원을 추적해 보거나... (18쪽)

(원문) When coverage is contradictory or confusing, we can read the original documents, or track down a dubious claim to its source... '미심쩍은 정보원을 추적해 보거나'가 아니라, 미심쩍은 주장을 그 원래의 출처로 올라가 확인해 본다는 뜻이다.

그건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존 듀이가 말했듯이 "위험에 빠진 세계의 어떤 지역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처럼 위험하죠. (18쪽)

(원문) It's risky. As John Dewey once said, "Anyone who has begun to think places some portion of the world in jeopardy." 듀이의 인용문 부분이 이해되십니까? '위험에 빠진 세계의 어떤 지역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 왜 위험한지? 실제 의미는 '사람들이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세계의 어떤 부분에 위험을 드리우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위의 문장과 이어지는 부분으로, 사람들이 뉴스같이 전해지는 말을 믿지 않고 스스로 능동적으로 의심을 품고 생각을 하게 되면 권위나 거짓이 위험해진다는 맥락이다.

하지만, 언젠가 스파이더맨이 말했듯이... "뛰어난 권력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18쪽)

(원문) But, as Spider-Man once said...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뛰어난 권력'이란 무엇일까. 당연히 '거대한 권력'이겠죠.

결국 법원이 이전의 금지령을 무효화했지만, 인쇄업자들은 여전히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발행할 경우 '선동적 명예훼손'으로 고발되어 파산할 수도 있었습니다. 진실을 전혀 지킬 수 없었습니다. '진실할수록 더 큰 명예훼손이 된다'고 법에 명시되어 있었거든요. (26쪽)

(원문) Eventually the courts revoke prior restraint, but printers can still be ruined by the charge of "seditious libel" for publishing criticism of the government. And truth is no defense. Legal doctrine holds that "the greater the truth the greater the libel"... '진실을 전혀 지킬 수 없었다'라는 말이 뜬금없이 왜 나왔는지 모른다. 실제는 '진실이라고 해도 면책되지 않는다'라는 의미.

(아마존이 허용하는 미리보기가 중간을 건너뛰고)

영국의 전설적인 저널리스트 클로드 코번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화당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던 1936년 6월, 스페인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74쪽)

(원문) The legendary British journalist Claud Cockburn was on vacation in Spain in July 1936 when the Spanish army under General Francisco Franco rose up against the democratically elected Republican government. 당시 스페인에는 '공화당'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Republican government란 공화제 정부를 의미한다.


미리보기로 대조해 볼 수 있는 부분만 봐도 이 지경이다. 만화인 만큼 그림으로 표현된 부분도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옮겨 무의미하게 만든 곳이 눈에 띈다.



여기서 적의 고위층을 잡으면 꼬추와 심장을 제거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손가락 뼈를 으스러뜨리고 손톱을 뽑고 손의 인대를 끊어놓는 것은 홍보를 담당한 필경사들에게만 가하는 특이한 대접이며, 그들이 손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맥락이 있다. 원저자 글래드스톤이 멍청이가 아닌 한, '손가락으로 하는 일은 참 특별하다'라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을 리가 있겠는가. 손가락을 응징하는 것은 특별한 처벌이라는 뜻.

결론: 이 책을 읽으며 머리가 무거워지거나 진도가 안 나가는 분이 있다면, 자책하지 마시라고 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

(알라딘의 이 책 소개 페이지에 실린 '마이리뷰'에는 엉터리 번역을 참다 못해 원문을 e북으로 사서 대조해 본 분도 있다.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을 끈덕지게 읽어낸 분들에게도 함께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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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8/04/27 23:3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4/29 10:2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northshore 2018/04/28 04:55 # 삭제 답글

    순진한 아이디를 앞세워...에서 빵 터지고 말았습니다. 번역의 문제도 퍽 심각해 보이지만 편집 과정에서 저렇게 말이 안 되는 부분을 다시 검토하는 과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지 새삼 의심하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 deulpul 2018/04/29 10:21 #

    늘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고 잘못 쓴 필자보다 그걸 잡지 않는 편집자가 더 미운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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