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만 명의 성난 사람들 때時 일事 (Issues)

국민청원 27만 넘었는데... 광주 집단폭행 살인미수 적용안해

제목부터 어이없다. 법의 적용과 집행이 국민청원의 양상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경찰은 이 사건의 가해자들에게 살인미수를 적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판단이 증거가 아니라 국민청원의 양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청원은 사법 집행을 규정하는 법률적인 절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동적이고 대표성이 모호한 여론에 따라 법이 집행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법과 규정이 아니라 일부의 의견에 의해 집행되는 사법제도, 예컨대 여론 재판이나 인민재판 같은 방식은 현대 민주사회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여러 사람이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관찰자의 의견이 법 적용에 직접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청와대가 홈페이지에서 운영하고 있는 국민청원은 법률적 강제력을 갖지 않는, 말하자면 의견 수렴 정도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법의 집행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한 기사 제목을 보니 말문이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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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이나 살인 미수가 성립하기 위한 요건 중 하나는 '죽이려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집단폭행 사건에서 피해자를 대변하는 변호사는 가해자들에게 살인 미수가 적용되어야 한다면서, 그 이유로 폭행을 하면서 '너 오늘 죽어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렇게 말했으니 살해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헨리 폰다가 주연한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법정 드라마의 최고로 손꼽을 만하다. 심사숙고하지 않는 비이성적인 대중이 사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어떤 위험이 벌어지게 되는지, 또 이른바 합리적인 회의(reasonable doubt)란 왜 중요한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마치 연극처럼 단일한 공간(회의실)만을 무대로 하여 한 시간 반 넘게 진행된다. 그런데도 단조롭기는커녕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하 약간의 내용 노출.)




'12명의 사람들'은 한 소년의 부친 살해사건 재판에서 유무죄를 판단해야 하는 배심원들이다. 재판이 진행되어 온 과정을 다 지켜본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리려 한다. 그런데 딴지를 거는 사람이 나타난다. 영화는 이 두 측이 각기 주장과 근거를 내세우며 밀고당기는 공방전을 벌이는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소년의 살인을 입증하는 증거 중 하나는, 그가 아버지에게 "죽여버릴 거야(I'm gonna kill you)"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은 증인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놓고 배심원들은 엇갈린 주장을 한다.


8번 배심원: 그가 그런 말을 실제로 했다고 칩시다. 근데, 우리도 이런 말을 숱하게 하지 않나요? '여보, 당신을 죽여버릴 거야', '너 또다시 그따위 일을 하면 죽여버리겠어', '우리 편, 힘내라, 상대를 죽여버려'... 우린 이런 말을 매일 하지요. 하지만 그게 실제로 누구를 죽이겠다는 의미는 아니잖아요.

3번 배심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걔는 분명히 '당신을 죽여버릴 거야'라고 악을 쓰며 외쳤단 말요. 그런데도 실제로 그럴 뜻이 없었다고 하는 거요, 지금? 누구든 저 자식과 같은 방식으로 말할 때는 그게 실제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오.

2번 배심원: 글쎄, 잘 모르겠네요. 내가 두어 주 전에 직장 동료하고 말다툼을 했는데, 나보고 등신이라고 하길래 화가 나서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쳤거든요.

3번 배심원: 이것들 봐요. 8번은 지금 당신들을 말아먹으려고 하고 있어요. 피고는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말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죽였단 말이요.


유죄론자인 3번은 '화가 나서 남을 죽이겠다고 소리칠 때는 정말로 살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영화 뒷부분에 가서, 논쟁중 화가 머리 끝까지 나자 8번에게 달려들며 "죽여버릴 거야. 당신을 죽여버리겠어" 하고 으르렁거린다. 8번은 조용히 "당신, 정말 나를 죽이겠다는 의미는 아니죠?" 하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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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들의 행위에 분노하며, 그들에게 죄에 값하는 혐의가 적용되어 법정최고형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분으로 죄를 다루고 감상으로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법치국가에서는 말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 많은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문제의식을 일깨워주고 지적 자극을 주는 값진 영화입니다. 강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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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8/05/10 23: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5/11 09:4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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