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책 읽기



3년 전 한국에 돌아왔을 때, 대형 서점의 글쓰기 책 서가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이 이렇게 많구나.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서점에 갈 때마다 자꾸 늘어나고 있다. 이것이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글쓰기에 관심이 많고 서가가 이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좋은 현상일 것이다. 반면에 질서 없는 곳에서만 질서를 지키자는 구호가 유효하듯, 글쓰기의 필요만 있고 관심이 없어서 주의를 환기하는 조언서들이 자꾸 나오는 것이라면 실망스러운 일이다. 글쓰기의 효용은 글쓰기 책을 쓰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많은 책 중에서 손에 딱 잡히는 게 많지 않다는 점도 아쉽다. 나는 3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윌리엄 진서가 쓴 <글쓰기 생각쓰기>가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기술이 아니라 자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어느 날 글쓰기 서가에서 책들을 열어보다, 무릎을 탁 치며 갑니다 얄팍한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는 책을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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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는 것은 말재주를 잘 부린다는 것이 아니다. 글감이 머리 속에 들어가 복잡하게 떠돌다 현란한 기교의 허울을 쓰고 나온 글들이 있다. 이런 글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소통에 실패하는 글이다. 이런 글쓰기는 자위와 같다. 자신만을 만족시킨다. 예전에 나는 '글쓰기는 자해 행위'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언젠가 '글쓰기는 자위 행위'라는 글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일기 같은 글은 본질적으로 자위용이니 어떻든 상관없을 것이다.

유치할 때는 이런 글이 멋있어 보인다. 사람과 세상을 겪어본 사람들은 그런 글을 쓰지 않는다. 그런 글을 쓰더라도 포장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남에게 줄 선물이 있다.

신문에 실리는 칼럼에서도 그런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신문들은 20, 30대랑 소통할 필요가 있으니 그 세대의 필자들에게 이런저런 형식으로 소중한 공간을 내준다. 그 공간을 메우는 필자들은 대개 자신의 머릿속만 죽어라 파거나, 좁은 경험에 매달려 그를 일반화하거나, 자신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열렬한가만을 줄기차게 고백한다. 그런 것을 기교로 포장한다.

그런 지면 낭비 공간에서 드물게 탁월한 필자를 이따금씩 만난다. 그들이 쓰는 담담한 글을 보면, 뿌리는 경험이고 줄기는 논리와 이성이며 열매는 신선한 주장이다. 좋은 글이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손바닥만한 크기의 칼럼 안에서 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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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전문가 대접을 받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특정한 직업군에서 쓰는 방식으로 쓰인 글을 대중에게 내놓는다. 이들이 쓰는 글은 다른 글들과 쉽게 구별된다. 남들은 쓰지 않고 그들만이 쓰는 (대체가능한) 단어를 굳이 사용하고, 형식도 자기들끼리만 통용되는 방식에 천착한다.

일기가 자위용이 되어도 상관없듯, 내부에서만 돌려볼 글이라면 어째도 상관없다. 하지만 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라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이 왜 그렇게 될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보니 업계의 글쓰기 습성에 젖어버린 것이다. 늘 기형적인 문장만 보고 살면, 그게 정상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 이유라면, 비슷한 열정으로 소통의 방식에 대해서도 고심해 볼 일이다.

한편, 열심히 해도 그렇게 되지만 아무 생각이 없어도 똑같은 결과가 벌어진다. 타성적으로 따라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뒷사람은 앞사람을 저절로 따라 가게 마련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일부러 그런 단어를 쓰고 그런 형식을 쓰는 경우다. 그런 것을 전문성이라고 착각한다. 이것은 자기 값을 높이려는 데서 나온 고집이다. 폐쇄적이고 불친절하고 알아먹기 어려운 글의 상당수가 이런 이유에서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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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괜찮은 글을 쓸까? 답이 나온 지 천 년도 더 됐다. 실제로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다독-다상량-다작. 이것이 컴퓨터공학에서 가장 처음에 배우는 시스템 얼개, 즉 [입력-연산처리-출력]과 흡사함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기반은 다독(多讀)이다. 간접 경험의 폭을 넓히는 일이다. 나는 이 말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양수 시절에는 글 쓰는 계층이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계급적으로도, 또 공간적으로 제한된 영역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람과 세상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길은 대개 책이나 이야기 뿐이다.

오늘날은 다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체험의 폭은 구양수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어졌다. 따라서 현대적인 의미에서 '다독'은 책으로 얻어지는 간접 경험뿐 아니라 소중한 재산이 되고 결정적인 글감도 되는 직접 경험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옳다.

사람과 세상을 체험으로 배우면 더욱 좋겠지만, 언제나 그럴 순 없으니까 책이 중요하다. 책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려주고,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려주며, 세상에 축적되어 온 지혜란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그래서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 주며, 문장이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고, 단어는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준다.




지난 2월 나온 2017년 한국인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1년 동안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은 60%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책을 안 읽어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이 수치가 10%로 떨어지더라도 하늘이 무너지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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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떤 글을 리뷰한 적이 있다. 그런 분야에 투신하기 위해 몇 년을 수련한 분이 쓴 글이다. 수십 쪽짜리 글을 읽고 나서 꽤 놀랐다. 스토리는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한 장면들의 모자이크 같았고, 무엇보다 단어를 잘못 쓴 게 흔하게 발견되었다. 맞춤법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비슷한 것 같지만 맞지 않는 잘못된 단어들이 쓰인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임은 이렇게 드러난다.

이것은 창작 영역 글에서의 경우다. 만약 이 글이 논설이나 칼럼이었다면, 빈독(貧讀)은 억지스런 주장, 안 어울리는 예시, 무리하게 일반화하는 협소한 경험, 말 눈에 차안대를 덮어씌운 듯한 편견 같은 것들로 드러났을 것이다.

독서의 빈곤, 다시 말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빈곤은 글쓰기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이야기할 겨를이 없다. 다만, 거꾸로 말하자면 책을 읽는 것은 글쓰기에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쓰려면 먼저 읽으십시오. 밥을 먹지 않는데 힘을 쓸 수 있겠는가, 똥이라도 한 무더기 푸지게 싸낼 수가 있겠는가. 읽더라도 되도록 제대로 된 것을 읽으십시오. 배를 채우겠다고 삼시세끼 불량식품을 처넣을 수는 없다. 안 먹어 굶어죽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GIGO다.

서점에서 만나는 글쓰기 책들의 미덕 중 하나는, 글을 쓰려는 사람을 격려하는 자세다. 저자들은 대개 글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그저 자기 생각을 요령있게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 조언은 친절한 것이지만, 나는 이것이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말을 듣고 독자가 그렇게 써낸 글을 저자들은 거의 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시간에 그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프로야구 중계를 볼 것이다.

그냥 무조건 써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생긴다. 독서를 하지 않고도 대중과 소통하는 글을 쓰겠다면, 오로지 자신이 아는 영역, 자신이 체험한 일에 대해서 쓰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흥미로운 생활을 영위해 온 사람은 많지 않다. 생각을 많이 하면 도움이 되지만, 요즘처럼 먹고 살기도 허덕허덕 바쁘고 눈길을 빼앗는 것도 요령조령 널린 세상에선 그것도 참 찾기 어려운 미덕이다.

책이요? 인터넷이, 스마트폰이 다 해결해 주는데요? ... 웰, 굿 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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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8/05/28 13:3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5/29 10:2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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