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다이어트 섞일雜 끓일湯 (Others)



강한 주장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것을 꺼내놓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과 만날 때, 나는 되도록 진지한 이야기를 피한다. 편하게 시작한 이야기가 말싸움으로 끝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피해야 하는 사람 중에는 어머니도 포함된다. 나이도 드셨으니 이젠 좀 둥글둥글해지실 만도 한데, 웬일인지 정치적 주장은 갈수록 단단해지기만 한다.

하긴 어머니가 "너는 어떠냐" 하고 반박하시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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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피하다 보니 어머니와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종종 의도치 않게 일합을 겨루는 때가 있다. 최근에 국회에서 염동열과 홍문종의 체포동의안이 부결되었을 때다.

"자알~ 되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 소식이 흘러나오자 어머니가 내놓으신 평이다.

순간 참지 못하고 나는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아니, 저게 잘 된 일이에요? 권력으로 인사청탁해서 멀쩡한 응시자들 피눈물나게 하고 뇌물 받아처먹고 공금 갖다 쓰고 한 거 제대로 조사도 못하게 된 게 잘 된 일이요?"

"다 똑같은 놈들 아니니. 지들도 다 구린 데가 있으니 저렇게 했겠지."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잘못한 놈들은 국해의원이든 누구든 조사받고 처벌받고 이렇게 좀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머니는 약간 물러섰다.

"누가 저 결과가 잘 됐다고 했냐. 홍문종 입장에서는 잘 되었다는 거지. 그동안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다고 하냐."

어머니가 다른 범죄자들도 두루두루 마음고생할 것을 염려해주시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어머니에게 홍문종은 다른 정치인과 좀 다르다. 의정부 지역구인 홍문종은 이 지역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동네에서 진보대마왕 + (웬일인지) 전라도 대표 노릇을 하고 있는 문희상을 견제할 유일한 희망이다.

게다가 어머니는 오랫동안 행정기관의 최말단 책임자로서, 또 이름을 계속 바꿔온 꼴보수당의 당원으로서, 또 그 당의 지역 부녀회장으로서 나름대로 정치 활동을 하여 왔다. 어머니는 이런 활동을 하시며 찍은 사진으로 앨범 두 권을 채웠으며, 같은 이유로 역대 대통령 시계들이 서랍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어머니의 활동 시기는 홍문종이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하던 시기와 겹치고, 그런 인연으로 어머니는 홍문종을 잘 안다.

'잘 안다'는 것은 그의 실체를 잘 안다는 뜻이 아니라 면식이 있고 우호적이라는 뜻이다.

어머니와의 홍문종 논쟁은 내가 식사를 중단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으로 끝났다.

물론 이런 일 하루이틀도 아닌데, 해소하는 방법이 없을 리 없다. 잠깐 열기를 식힌 뒤, 나는 다시 나와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자알~ 됐다, 자알~ 됐어, 잘됐군 잘됐군 잘됐어~" 하고 혼자 개사곡 콧노래를 부르셨다.

내가 열받으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나름의 희석화 작업이다.

역효과가 난다는 것은 잘 모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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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트럼프 때문에 모자가 밥을 제대로 못 먹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고 텔레비전 뉴스가 사흘째 그 소식을 다량 보도할 때다.

"김정은이 수법에 다 말아먹히고 있네. 저 새끼들이 참 잘도 비핵화 하겠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하는 뉴스 비평에 모두 대거리를 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나는 굶어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아니, 수십 년 서로 죽자살자 하며 살아온 거, 이제 좀 긴장 풀고 안심하고 살아보자고 노력하는 게 잘못된 거에요? 자꾸 만나고 대화하고 해야 좀 새로운 시대로 나갈 거 아뇨. 우리 살아온 대로 애들한테도 그렇게 물려주면 되겠어요?"

"그건 이쪽 생각이구, 저 새끼들은 남한을 말아먹을 생각만 한다니까."

북한 미스터리 킴의 의도에 대해서, 내로라 하는 북한 전문가나 정부 정책담당자들보다 어머니가 더 잘 아신다. 낮에 종편 출연자들이 어떤 나팔을 불어댔는지 짐작이 됐다.

나는 또 식사를 중단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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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가 6월로 예정되었던 북미 정상회담을 뒤엎었다는 긴급 뉴스가 텔레비전에서 나왔다.

"거봐라! 내가 뭐라 그랬냐. 될 리가 있나. 호구나 김정은이하고 대화하지,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 대화 하겠냐."

나는 역시 식사를 중단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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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과 김정은이 예정에 없이 갑작스럽게 다시 만났고, 트럼프가 김계관의 담화를 우호적으로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회담이 성사될 수도 있다고 여지를 열어 두었고, 이 모든 게 트럼프의 협상 전략일 수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

"......"

이윽고 어머니는 식사를 중단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리셨다.

이 모자의 다이어트는 앞으로 상당 기간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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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Evermarquez 2018/05/28 06:23 # 삭제 답글

    ㅎㅎ 재밌습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과는 정치적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아 이야기 나누고 이어가는데 불편이 없는데 상상해보니 정말 다이어트 감이 될 것 같네요
  • deulpul 2018/05/29 10:46 #

    행운이시군요! 근데 하긴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관계에서 저런 일이 흔히 벌어지지요... 안 맞고 살 빠진다고 안 살 수도 없고요, 하하.
  • 2018/05/28 09: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5/29 10:5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northshore 2018/05/28 22:50 # 삭제 답글

    한편으로는 재미있으면서도, 제 경우가 떠올라 속으로 또 한번 끌탕합니다. 저희 어머니 생각이 나서요. 노태우는 귀가 잘 생긴 귀인이라 찍어줘야 하고, 김대중은 다리를 저는 **이라 안되며, 문재인은 빨갱이라 찍어줄 수 없다...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는데요? 남들이 다 그래... 아 정말! --** 요즘 한국의 노인들이 가짜뉴스의 희생자이자 최대 유포자라는 소식을 봤습니다. 참 서글픕니다. 환장하게 열받기도 하고요. 사람에 대한 전반적 신뢰랄까 희망을,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잃어간다는 생각입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시대가 바뀐다고 사람의 인식과 이해가 진보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누군가 그랬다죠, 인간이 역사에서 배우는 한 가지 사실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점이다라고...정말 맞다는 생각입니다.
  • deulpul 2018/05/29 13:35 #

    인간이 원래 그렇다라는 것을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늘 실망하는 저희도 역시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는 농담이고요, 하하. 한편 어르신 중에 다른 분들과 다른 분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촛불/태극기 시위 한창일 때는 1호선 지하철 경로석에서 서로 정견이 달라 싸우는 분들도 봤고요, 노란 리본을 단 배낭을 멋지게 매신 백발 노인도 보았고요, 태극기 부대 시위장 가서 용감하게 발언하다 끌려내려간 할아버지는 유명하죠. 물론 드물어서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겠지만요... 한편 다른 세대도 가는 길의 방향은 맞더라도 얼마나 이성적인 과정을 통해서 선택된 것인가에 의심이 드는 경우가 많아서, 이래저래 인간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하는 편이 낫다는 절망적인 생각을 하곤 합니다.
  • 2018/05/30 08:5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18/05/30 09:51 #

    맞습니다! 맞장구는 긍정적인 호응을 뜻하니, 어머니의 뉴스 비평을 상대하는 말로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아주 눈밝게 잡아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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