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만찬에 초대되기를 기다리세요? 섞일雜 끓일湯 (Others)



2018년 퓰리처상 비평부문 상을 받은 제리 살츠(위)는 <뉴욕 매거진>에 미술 비평을 쓴다. 그러나 그는 미술 관련 학위도 없고 글 쓰는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시카고에서 미술대학을 두어 해 다니다 때려치웠다. 동네 미술계 언저리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하다보니, 자기가 아는 미술가들이 모두 뉴욕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살츠 역시 부와 명예를 찾아 뉴욕으로 옮길 결심을 한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새로운 세상에서 미술가로 다시 시작할 작정을 했지만, 자신이 이미 늦었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뉴욕 미술계의 벽은 높았다. 그는 두 해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냈다. 그런 생활이 매우 초조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기약 없는 희망을 접고 창작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트럭 운송 회사에 들어가 운전사가 되었다.

홀로 트럭을 몰고 다니는 동안, 그는 자신이 미술 작품과 미술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생각했다. 무엇이 되든, 그 세계를 떠날 수는 없었다. 미술 비평을 하는 것은 창작을 하는 것보다는 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미술비평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그가 평생 무엇을 써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현대 미술을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 <아트 포럼>을 탐독했다. 그 기사들은 멋지고 똑똑하며 뭔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보기에 이 잡지 기사들은 미술을 미워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살츠는 <아트 포럼> 스타일을 흉내내는 글을 써봤다. 쓰고 나서 읽어보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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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브루클린 레일> 잡지에 실린 인터뷰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기자: 당신은 비평가로서 성공적인지를 알 수 있는 척도는 글에 대한 신뢰의 여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살츠: 누구나 그렇듯 나도 처음에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그래서 그런 글을 썼습니다. 누군가를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글을 쓰고 나면, 그들은 '오, 제리, 우리 파티하는데 오세요'라고 말하죠. 그런 자리에 가면 늘 무언가가 빠져 있거나 허위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나의 글에서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었던 것이죠. 남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써야 한다고 결심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신뢰는 권위와는 다른 것입니다. <뉴욕 매거진>에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권위를 줄지 모르지만, 내가 최대한 정직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 대한 신뢰를 만들어줍니다. 신뢰는 그 누구도 탈취해 갈 수 없는 것이지요.


권위와 신뢰를 구분하여, 권위와 영향력은 어떤 매체에 글을 쓰느냐에서 오지만, 글과 필자에 대한 신뢰는 정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쓰는 데서 온다고 보는 깨달음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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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나 평론은 위험한 작업이다. 특히 특정 업계, 이를테면 미술계나 문단처럼 작은 세상에서, 서로 다 알다시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평론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좋게 썼을 때 대상으로부터 받을 호감도 부담이 되고, 나쁘게 썼을 때 대상으로부터 받을 미움도 걱정이 된다.

호감과 미움 중에서 더 걱정해야 할 것은 전자다. 글을 써서 그 대상으로부터 호감을 얻고 칭찬을 들으면 필자는 자족과 자만의 루트를 타게 된다. 이들의 칭찬은 이해당사자의 칭찬이다. 그러나 글 쓰는 사람은 그것을 객관적인 평가로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자꾸 호감을 받을 만한 글을 쓰게 된다.

아세(阿世, 세상에 아첨함)는 이렇게 자족감에서 시작되고, 필자는 남이 싫어할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기형적인 비평가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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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세상은 자족감에서 시작하여 아세로 전락할 위험이 극단화된 곳일 것이다. 읽은 이의 반응이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양상으로 즉각즉각 달라붙는 공간에서 글을 쓰는 일이 초래하는 결과는 양면적이다. 남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하면 몰핀보다 약효가 빠른 '좋아요'들이 붙는다. 남들이 싫어할 만한 말을 하면 정제되지 않고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욕지거리가 붙는다.

이 역시 글쓰기에 따르는 호감과 미움 반응의 한 형태지만, 그 양상이 훨씬 노골적이라는 게 다른 글쓰기와 다른 점이다. 온라인 글쓰기는 그 압력의 정도가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호감과 미움은 이중의 압력이지만, 여기에서도 더 중요한 것은 미움보다 호감의 압력이다. 욕설이며 지청구는 개소리라고 씹어넘기고 정신승리할 수 있지만, '좋아요'는 무시하기 어려우며 생생히 살아 필자의 자아 구현에 기여한다.

공개된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이해관계가 있다. 그의 한쪽에는 글을 쓰고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다른 쪽에는 자신의 평판과 이미지에 대한 염려가 있다. 이 둘은 종종 서로 대립하고 갈등한다. 그런데 '좋아요'는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만족시켜준다.

이러한 원초적 피드백 현상이 복잡한 심리 과정을 거쳐 결국 표현하고자 하는 글, 더 나아가서 생각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결정까지 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어떤 행동을 자꾸 하다보면, 그것은 습관이 되고 더 나아가 천성이 된다. '침묵의 나선' 이론에서는 주류 담론이 소수 의견 표현에 영향을 끼쳐 말문을 닫게 만든다고 보지만, 더 나아가 사고의 내용에까지 잠재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컨텐츠보다 관계가 우선인 SNS의 글쓰기가 폐쇄 공간 안에서 끼리끼리의 대화로 전락하게 된 것은 이러한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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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글쓰기가 무엇인가. 세상이 모두 옳고 누구나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이 세상에 글쓰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서로 핥고 빠는 추천사와 주례사만이 존재할 것이다.

글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인식을 건드리고 환기시켜 토론을 촉발하고 촉진해야 한다. 설령 그러한 환기가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촉발된 토론이 있는 세상이 없는 세상보다 훨씬 낫다고 존 스튜어트 밀은 주장한다.

대중을 상대로 하여 사랑받기 위해 글을 쓰다 보면 사랑받기 위해 생각하기가 되고, 이윽고 자기 생각은 타협되어 없어진다. 그 결과 대중의 만찬에 초대되어 흥청망청 할 수는 있겠지만, 누구도 그렇게 비겁한 사람을 진실로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덧붙임] (8월4일 19:40)

프리드리히 니체, <선과 악을 넘어서> 중에서:

99. 실망한 자는 말한다: "나는 반응을 듣긴 했지만, 오로지 칭찬에만 귀를 귀울였다."

122. 칭찬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 중 다수는 그저 예의를 차리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정신적 자만심을 키우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태도다.

170. 비난보다 칭찬 속에 더 많은 강요가 숨어 있다.

283. 누군가를 칭찬하고자 할 경우,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만을 칭찬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섬세하고 고귀한 자기 통제에서 나온 칭찬이다. 그 외의 경우 칭찬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있을 뿐이다. ... "그가 나를 칭찬한다. 따라서 그는 내가 옳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추론은 우리 은둔자들 인생의 절반을 망치게 만든다. 이웃과 친구 사이에 고집쟁이들을 데려오는 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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