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익청 섞일雜 끓일湯 (Others)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말이 있다. 여름의 난로나 겨울의 부채처럼 격에 맞지 않거나 쓸모가 없는 것을 말한다. 거꾸로 말하면 난로는 겨울에, 부채는 여름에 써야 한다는 뜻이 되겠다. 하지만 이렇게 서늘해지는 계절에도 여전히 쓸모가 있는 부채가 있다.

문인화가 유천 오수철 선생님이 그린 부채가 사람 사이의 인연으로 인해 내게까지 왔다. 지난해 여름 글과 글씨를 함께 하는 선배가 준 것인데, 그린 사람의 정성과 준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여 잘 모셔두고 있다. 나에게는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아니라 마음을 일으키는 도구다.

부채에 쓰인 글귀는 향원익청(香遠益淸), 향은 멀리 있어 더욱 청아하다는 뜻이다.

중국 북송시기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시 '애련설(愛蓮說,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에 나오는 글귀라고 한다.


(전략)

진흙에서 나왔음에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워도 요사스럽지 않고
가운데는 통하고 밖은 곧으며
덩굴을 뻗거나 가지를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리 있어 더욱 맑으며
우뚝하고 깨끗하게 서 있으며
멀리서 바라볼 수 있으나 희롱할 수는 없다

(후략)


대개 연꽃은 큰 연못 한가운데 피게 마련이므로, 옛사람들은 그런 물리적 거리를 덕으로 생각해온 듯하다. 사람 가까이 있어 손을 타고 더러워지는 꽃이 아니라 멀찍이 거리를 두고 향기나 은은히 피워내는 꽃이니 기특하게 보일 만하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 강세황의 그림 '향원익청'은 한 술 더 뜬다. 연꽃 그림에 적힌 글귀는 "염계 선생(주돈이)은 연꽃 향기를 멀리서만 맡고 희롱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연꽃 그림 역시 멀리서 보아야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라고 되어 있다.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멀리서 향을 풍기는 연꽃은 불교뿐 아니라 유교적 세계관에도 잘 맞는 꽃인 것 같지만, 한편 또 생각하자니 이 꽃에 대한 열렬한 애모는 기실 '단 포도 우화'의 한 갈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연꽃의 향기를 맡기는 쉽지 않다. 여름 한철 잠깐 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피었다 해도 거리가 있어서 다른 꽃들처럼 코를 들이대고 향기를 맡기 어렵다. 꽃무더기가 한창일 때는 연못 전체에 은은한 향기가 감돌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연향을 맡아본 기억은 별로 없다. (내가 대개 드넓은 연못에서 연꽃들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옛사람들은 실증적으로 검증하기 어려운 연꽃의 향기를 사실보다 더 이상화하고, 자신이 그러한 대상에 가까이 가기 어려운 사정을 꽃의 미덕으로 전화시켜 표현하여 온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어쨌든 연꽃의 향기가 그윽할 것임은 분명할 듯싶고, 향기가 멀리 있어서 더욱 청아하다는 표현도 매우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없다.

'향원익청'은 <한겨레>에서 대기자를 하다 작년 여름에 퇴직한 곽병찬 기자의 연재 칼럼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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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으로든 인공으로든 물이 고인 널찍한 곳을 연못이라고 한다. 김민기의 포크송 '작은 연못'에서 붕어들이 싸우다 함께 망한, 깊은 산 오솔길 옆 바로 그 곳도 연못이다.

연못은 순우리말이 아니라 한자+한글 복합어다. 사전을 찾아보면 [蓮 -] 이라고 병기되어 있다. 앞의 연은 물론 연꽃이다. 오래 전부터 못에는 늘 연이 서식하고 연꽃들이 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연꽃이 없어도 연못이라고 하게 되었다.

조선 법궁인 경복궁에는 연못이 두엇 있다. 하나는 경회루가 있는 연못이고, 또 하나는 후원에 있는 향원정 주변의 향원지이다. 경회루의 연못에는 따로 이름이 없다. 연지(蓮池)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글자 그대로 연꽃 저수지, 즉 연못의 순한자 표기이다. 향원지(香遠池)는 향이 멀리 퍼져나가는, 혹은 향이 멀리서 전해오는 못이라는 뜻이다. 정자 향원정(香遠亭)도 마찬가지 의미고, 향원지를 가로질러 향원정으로 가는 다리의 이름 취향교(醉香橋)는 향에 취하여 건너는 다리라는 뜻이다.

향원익청의 미감이 구석구석 밴 곳이 아닐 수 없다.


향원지, 취향교, 향원정 (사진: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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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익청이 절실할 때가 종종 있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에서 엄청난 향기를 뿜는 사람 옆에 서게 되었을 때다. 체취가 그렇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다. 본인도 어떻게 하기 어려운 일일 테니까. 담배 냄새 같은 것도, 속으로 좀 찌푸려질지언정 본인이 원해서 풍기고 다니는 건 아닐 테니 뭐라고 하긴 그렇다.

문제는 향수다. 향수를 지나치게 뿌려서, 향기이기는커녕 정말 속이 메슥메슥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자극적인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과한 향내를 좋아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그러자니,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했는지 궁금하게 된다. 취향은 존중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주변 사람도 좀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향원익청의 미덕이 아쉬울 때다.

(고백하건대 과거에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향수를 쏟았는데 뒷수습을 할 시간이 없어 그냥 나섰던 때가 있다. 내 코는 곧 무디어졌지만, 남들 코는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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