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 연구

가까이 계신 목사님으로부터 책을 몇 권 빌려왔습니다. 그 중에,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 가 들어 있었습니다. 1975년 한국문학사에서 발간한 초판, 표지 장정을 작가가 직접 한 그 책이었습니다.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주인을 따라다닌 책은 누렇게 변색해 있었지만,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내가 광화문의 한 할인서점에서 <죽음의 한 연구> 를 보고 확 반한 건 1990년 전후였던 것 같습니다. 딱 두 페이지를 보고서였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년 오줌 누듯 여덟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


이게 책의 첫 페이지를 다 차지하는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모두 253자입니다. 둘째 페이지로 넘어가면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리에서는 그러나, 가슴에 불을 지피고는, 누구라도 사십일을 살기가 용이치는 않다. 사십일을 살기 위해서는 아뭏든 누구라도, 가슴의 불을 끄고, 헤매려는 미친 혼을 바랑 속에 처넣어, 일단은 노랗게 곰을 띄워 내든가, 아니면 일단은 장례를 치러놓고 홀아비로 지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 또 아니면, 사막을 사는 약대나, 바다밑을 천년 한하고 사는 거북이나처럼, 업(業) 속에 유리를 사는 힘과 인내를 갖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리를 사는 힘과 인내로써, 운산이나 눈뫼나 비골을 또한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인데, 이리의 무리는 눈벌판에서 짖으며 사는 것이고, 신들은 그렇지, 그들은 어째도 구름 한자락 휘감아 덮지 않으면 잠을 설피는 것이다.


바로 이어서, 한 늙은 중의 몰골을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늙었다는 것 모두 빼놓고 소탈히 계산해도, 그 중은 보통 키도 못되게 형편없이 작았고, 다리도 몹시 깡마른데다 빈약해서, 대체 그런 체신으로 어떻게 그 먼 거리며 그 많은 고장들을 좁히고 다닐 수 있었는가 그런 의심부터 일으켰는데도, 그래도 그의 이야기엔, 밤늦게 돌아와 제놈의 신방 빼꼼히 열어보고 눈치 챈 처용이놈만큼은 뭣엔가 통해져 있는 것도 같았고, 또 눈에는 할멈 무덤 옆에 자기 누울 헛묘 봉분 만들어 놓고, 자기 무덤 위에 요요히 앉아 한 대의 골통 담배를 태우는, 저 촌로의 눈에 담긴 흥그렁함 같은 것을 또 담아 놓고도 있었다.


네... 특히 밑줄친 부분, 또 그중에서도 특히 "요요히 앉아" 와 "눈에 담긴 흥그럼함" 이라는 말이 너무 좋았습니다.

박상륭의 이 소설은 무릇 글로 먹고 살거나 글로 먹고 살기를 꿈꾸는 사람에게 무한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 줍니다. 김현이 말하듯이 "더 덧붙일 것이 없는" 촘촘히 직조된 박상륭의 글은 관념을 표현하는 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반면, 도대체 막힘과 한계가 없이 넘나드는 그 문장과, 그 뒤에 숨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사유의 폭은 동료와 후배들에게 깊은 절망과 부러움을 안겨줍니다. 이런 박상륭의 면모를 시인 남진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박상륭을 떠올릴 적마다 생각나는 불경의 한 구절이 있다. "사자가 한번 울부짖으니 여우의 머릿골이 찢어지도다." 박상륭, 그는 1960년대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한국문학계의 평원을 내달리던 한마리 사자였다.

이 소설 읽기의 어려움을 김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을 다른 소설 읽듯이 단숨에 읽어내려가려고 할 때에는 그의 소설만이 갖고 있는 재미를 느끼기 힘이 든다. 그의 소설은 천천히 그리고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약간 어색한 듯한 구문이나 어투, 그리고 사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사투리로 엮어진 그의 문장은 마치 이문구의 그것이 그렇듯 처음 그것을 읽는 자에게 상당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그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의 소설을 끝까지 읽어낼 도리가 없다.

소설에 얽힌 일화 하나입니다. 전해 들은 것이라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박상륭이 캐나다에서 쓴 이 소설의 원고 뭉치를 들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가 붙인 원래 제목은 <죽음의 연구> 였다고 합니다. 박상륭과 막역한 사이인 이문구 조태일 등 몇몇 동료 작가들이 박상륭과 그의 소설을 보러 청진동 해장국집에 둘러앉았습니다. 그들은 원고의 부피를 보고 깜짝 놀랐고, 무엇보다 제목에 더 놀랐습니다. <죽음의 연구> 라니.. 이게 무슨 소설 제목이냐. 무슨 논문 제목으로나 어울릴 법한 게 아니냐. 집어치워라... 운운, 정겨운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질만한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밤새 서로 밀고당기고 싸운 끝에 나온 타협점이 "한" 을 집어넣은 <죽음의 한 연구> 였다고 합니다.

1996년에 양윤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제목은 <유리> 입니다. 박신양이 처음 주인공을 맡아 대중적으로 알려진 영화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와 함께 내 차 트렁크에 실려 항상 나와 함께 다니던 제 <죽음의 한 연구>. 어느 늦여름, 강원도로 휴가를 가는 길에 차 뒤에서 책을 발견한 내 친구가 그 책을 빌려갔습니다. 그는 지금은 원불교 교무가 되어 독일로 부임하여 갔습니다. 내 책 또한 그의 짐 어딘가에 묻혀 있거나 아니면 저 같은 사람을 만나 또 돌고 있겠지요.

500쪽에 이르는 책의 부피와, 동서양 고근대의 종교적 은유로 가득찬 내용의 부피와, 비약되고 단절된 이미지가 호흡 긴 문장으로 이어지는 글의 부피 모두에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소설. 읽어내는 것만으로 유리(羑里)의 은밀한 결사에 가입하게 되는 소설. 이 가을에 당신이 진지한 독서를 꿈꾼다면 한번 도전해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아 참, 난해함이 주로 강조되었는데,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덧글

  • 이승은 2004/10/11 03:04 # 삭제 답글

    저 처음입니다.(__)
    죄송합니다만..
    혹시 죽음의 한 연구 한글97이나 기타 다른 수단으로 컴에 옮겨놓은게 있으시다면 저좀 주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__)
    samayoro@naver.com
  • deulpul 2004/10/12 14:50 # 답글

    양이 워낙 방대해서 저도 꿈도 못꾸고, 아직 어디에서 본 적도 없습니다. 도움을 못드려 죄송하네요. 혹시 발견하게 되면 꼭 알려드리겠습니다.
  • 마야 2005/03/11 19:56 # 삭제 답글

    상륭님을 생각하니 흐뭇합지요. 제 친구들 중에서도 여럿 망가졌습지요. 자기 밖에선 희망을 보았지만, 자기 안에선 절망을 맞이했던 것입지요. 조금만 더 다작했더라면, 한국의 토스토예프스키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 텐데...지금도 늦지 않았습지요만. 아무튼 상륭님을 검색하다가 여기까지 들어왔습지요.
  • 르안 2006/05/27 22:49 # 삭제 답글

    15년 전 쯤에 도서관 한 귀퉁이서 웅크리고 빠져들었던 책이네요. 언젠가 비됴 샵에 보니 '유리'라는 제목의 음침한 커버의 비됴가 있어서 보니, 그게 바로 그건거입지.
    이 소설 읽고 한 동안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기억이...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느새 몇 년이 훌쩍 흘러버린거입지.
  • deulpul 2006/05/28 16:28 # 답글

    하하입지, 무척 오래 된 글에 댓글을 다셨군입지. 비슷한 느낌과 경험을 가졌다고 하시니 더욱 반갑단 말입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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