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90%가 생활 형편이 어렵다?

최근에 언론에서 여론조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언론사가 자체적으로 하는 것도 있고, 다른 기관들이 행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신나게 보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수 언론이 여론조사 결과를 신나게 보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현재 국정과 관련한 여론이 모두 그다지 좋지 않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론이 좋지 않게 나올만한 상황이긴 하지만 말이지요.

여론조사는 흔히 이런저런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알아보는 척도로 오해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여론조사는 글자 그대로 여론을 파악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 반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여론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도구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여론조사를 통한 언론의 여론 왜곡은 조사와 해석 및 보도 과정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1) 여론조사를 발주한 기관의 영향, 2) 선입견과 편견이 반영된 설문조사 문항의 문제, 3) 불완전한 조사 방법 (표본 추출, 면접 방법 등), 4) 수집된 데이터를 잘못된 방법으로 분석, 5) 누락, 축소, 과장을 통한 분석 결과의 왜곡 등이 그 중의 일부입니다. 물론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활용하여 치밀하게 준비하고 시행한 여론조사는 신빙성이 높습니다. 요즘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여론조사는 대부분 공신력있는 여론조사 기관이 이러한 방법을 통해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론조사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언론사와 여론조사 회사는 서로 긴밀히 협조하며 조사 내용을 조정합니다. 조정과 검토 내용은 설문 하나하나에까지 이를 때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 관한 한 언론이 발주 기관이고 여론조사 회사는 하청 업체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또한 조사 방법이 객관적이라고 해도, 언론이 그 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삑사리를 내면 결과적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오도하는 일이 됩니다. 특히 과학적 여론조사 방법이 태동된 분야인 선거 결과 예측 분야는 나중에 진짜 선거를 통해 여론조사가 얼마나 쓸만한 것이었는지를 검증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여론이나 국민 정서 따위를 물어보는 여론조사는 누가 진짜 답을 내어주는 게 아니므로, 반복 조사나 비슷한 다른 여론조사에서 나온 결과와 대조하는 방법을 빼고는 검증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도 많이 벌어지는 것이 여론조사 관련 기사입니다. 흔히 언론인들은 여론조사 기사란 별다른 취재를 하지 않아도 이미 나온 결과만 가지고 쓸 수 있는 기사이므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숫자로 표현된 여론을 해석하여 다시 언어로 재구성해야 하는 여론조사 기사야말로 수많은 오류가 만들어지는 "구멍" 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론을 잡아내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해석하여 풀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죠.

최근에 한 신문에 나온 여론조사 기사를 잠깐 볼까요.


10가구중 6가구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

국내 수도권 10가구 중 9가구가 생활형편이 어려우며 특히 6가구는 외환위기 때보다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수도권 7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소비위축의 주요원인과 대책조사' 자료에 따르면 이들 가구의 90.4%가 생활형편이 어렵다고 응답했다. 특히 '외환위기 때보다 어렵다'는 응답은 전체의 60.4%로 가장 많았고 이어 '외환위기 때와 비슷하다'(22.3%), '외환위기 때보다는 좋지만 어렵다'(7.7%) 순이었다......


기사는 10 가구 중 9 가구가 생활 형편이 "어렵다", 특히 6 가구는 외환위기 때보다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고 단정하면서 기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 따라나오는 내용을 보면 이 기사의 리드가 잘못된 것임이 곧 드러납니다. 사실은 10 가구 중 9 가구가 생활 형편이 "어렵다고 응답했다", 6 가구는 외환위기 때보다 "어렵다고 응답했다" 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차이는 매우 큽니다. 기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여론조사 결과 나타난 것은 견해입니다. 기사는 견해를 사실로 치환시켜버렸습니다.

우리가 생활 형편이 어렵다고 이야기할 때는 소득, 소비, 저축 같은 다양한 경제 지표를 떠올리게 됩니다. 생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생활보호대상자 지정에는 4인가구 기준 월소득 1백5만원이라는 객관적 기준이 적용됩니다.

그러나 개인들에게 생활 형편이 좋은가를 물어보면 매우 주관적인 대답이 나오게 됩니다. 월 수입 1000만원이던 사람이 최근에 700만원으로 수입이 줄면 생활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소득자입니다. 반면 월 수입 50만원으로 혼자 살아가시는 어르신이라면, 생활 형편이 어렵냐는 질문에 "뭐, 이 정도면 노인네 혼자 먹고사는데 지장없지, 어렵긴 뭐..." 하고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여하튼 개인들이 파악하는 자기 생활 형편이란 매우 주관적이라는 말입니다.

2003년 10월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 (pdf 파일입니다)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3분의 1 정도(33.2%)가 월 수입이 250만원을 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150만원 이하로 "형편이 어려움직한" 사람들도 그 정도 비율(31.6)이었습니다. "형편이 어렵다"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어쨌든 국민 중 90%가 생활 형편이 어렵다고 하기는 좀 어려운 숫자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생활 형편이 어려운가?" 처럼 주관적인 기준들이 작용하는 질문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살림살이의 체감 지수 정도일 뿐이며, 이것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예컨대, 당신의 생활 수준이 상층인가, 중층인가, 하층인가를 물어보는 질문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각종 경제적 지표와 상관없이, 응답자들 대부분이 자신을 중산층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시 원래의 기사로 돌아가서, 결국 이 기사는 "국내 수도권 10 가구 중 9 가구가 생활 형편이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며, 특히 6가구는 외환위기 때보다 어려운 것으로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라고 해야 정확한 해석이 됩니다.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작성된 아래 기사에서와 같은 표현이 되었어야 하지요:

정부의 잇따른 부인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91.6%가 현 경제상황을 위기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민의 절반이상은 지금 살림살이가 IMF사태때보다도 나빠진 "제2의 IMF사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프레시안>

그럼, 문제의 기사에서처럼 견해를 사실로 단정해버린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실수일 수도 있겠지만,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본질적으로 언론은 물렁물렁하고 모호한 것보다는 강하고 충격적인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 편이 독자 눈을 더욱 잡아 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문제의 문장은 기사의 리드 부분. 생활 형편이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보다, 그냥 생활 형편이 "나쁘다"고 해야 확실한 인상을 심어 줍니다. 생각해 보세요. 국민의 90%가 생활 형편이 나빠 헐벗고 굶주리는 것 같은 상태입니다.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무엇에 대한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일까요? 물론 지금의 경제가 나쁘다는 데 데한 확실한 인상이지요. 지금이 경제가 좋지 않아서 밥벌어 먹고 살기가 녹록치 않다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러한 사실과는 상관없이, 잘못된 표현을 통해 이렇게 강하게 밀고 나오는 것을 순수한 실수로만 보기 어려운 게 지금의 언론인 것 같습니다.

덧글

  • deulpul 2004/09/24 07:25 # 답글

    자잘한 것을 붙잡고 늘어지는 셈이 됐는데, 비단 여론조사 관련 기사의 오류는 이 기사에서뿐만 아니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라서 주저리주저리 썼습니다.

    문제의 기사 출처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습니다.

    제목이 너무 찌라시틱해서 다시 바꾸었는데, 밸리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죄송-
  • 페리체 2004/09/24 09:05 # 답글

    언론매체가 센세이셔널한 것만을 쫓는 게 워낙 당연한 일이 되어버리고 나니, 요즘은 괜시리 쓸 데 없는 거 하나 하나도 고깝게 보는 경향이 생기더라구요. 그러다보니 안그래도 숫자에 약하면서도 어디서 내놓는 조사나 숫자같은 건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됩니다. 사실 질문 방향만 조금 건드려도, 얼마든지 조사자의 목적에 맞는 답변을 얻을 수 있잖아요. 이래저래 의심만 많아지고 괜히 성격만 나빠지는 느낌이 듭니다.
  • anakin 2004/09/24 09:38 # 답글

    예전 독일에서 통일 독일의 수도에 대한 여론 조사를 여러 신문사들에서 했던 적이 있었죠. 그런데 본에 위치한 신문사에서는 조사 결과 본이 지지율이 높다는 기사를 내보냈고, 베를린에 위치한 신문사에서는 베를린의 지지율이 높다는 기사를 내보내었던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일단 통계 수치는 작성자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가정 하에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 에쓰군 2004/09/24 12:11 # 답글

    객관적이라는 말로 사람속여먹는 언론들이 많습니다. 의도했던 실수도 많이하는 언론도 많이있구요. 그들이 얻는 이익이 뭐일지 참 궁금합니다.
  • 명랑이 2004/09/26 16:12 # 답글

    선입관이 가장 클 거 같네요.
    인식은 사실을 지배하고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고 키키..
  • deulpul 2004/09/26 17:08 # 답글

    페리체: 세상이 나에게 던져주는 것을 정당한 이유로 의심하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네... 너무 피곤해지지요.

    anakin: 그런 일도 있었군요. 숫자란 정말 믿을 게 못되나봅니다. 가장 명쾌하고 깔끔하게 보이는 표현인데도 말여요.

    에쓰군: 네, 저도 궁금합니다. 어쨌든 어떤 이익 추구라도 방법이 정당해야 공감을 얻을 수 있겠지요.

    명랑이: 누구나 선입견과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왜곡된 시각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독자들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언론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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