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도덕이야, 멍청아! 미국美 나라國 (USA)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아버지 부시가 재선을 노리며 걸프전을 비롯한 국제 이슈를 들고 나와 선거 운동을 펼칠 때, 상대측이었던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 하고 맞섰습니다. 엄청난 재정 적자를 비롯하여 나라와 시민의 살림살이를 거덜내어 놓고 나라 밖에서만 삐까뻔쩍한 공을 세우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주장이었습니다. 클린턴이 선거에서 무난히 승리한 뒤, 경제를 주요 이슈로 내세운 선거 전략이 주효했다는 분석이 나왔었습니다.

죽은 자식 불X 만지는 심정으로 부시가 재선에 성공한 이번 선거를 돌이켜보면, 결국 “문제는 도덕(moral)이야, 멍청아!” 가 됐던 모양입니다. 워낙 굵직굵직한 이슈가 많았던 터라, 아무도 이 모호한 가치관이 선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결국 그렇게 됐습니다. 무수한 희생을 낳고 있는 이라크 전쟁도, 인권을 일상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애국법도, 수많은 일자리가 날아간 실업 상황도, 돈줄을 죄는 바람에 황폐 일로를 달리고 있는 공교육 환경도 모두 결정적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미국 중부의 캔사스 주는 지리적으로 미국 영토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한 미주리 주와 함께 “미국의 심장” 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웁니다. 지도로 보면 정말 미국 땅덩이에서 동서남북의 딱 중간쯤 됩니다. 이번 선거에서 미국 중부 거의 전체가 시뻘겋게 물들었지만, 특히 캔사스는 그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부시에게 표를 몰아주었습니다. 캔사스 투표자 중 62%가 부시를 지지했고 37%만이 케리를 찍었습니다. 부시의 고향인 텍사스에서보다 부시 지지율이 높았습니다 (텍사스는 각각 61%, 38%).

어떤 미국인들에게 이같은 결과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다가옵니다. 농민들과 블루 칼라 같은 노동계급이 주 전체의 주요 구성 인구인 캔사스는 그동안 전통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번 선거에서는 105개 카운티 중에서 103개 카운티가 부시에게 넘어갈 정도로 몰표가 나왔을까요.

이 주 출신으로, 이번 선거를 분석한 책 <캔사스에서 벌어진 일: 보수주의자들은 어떻게 미국의 심장을 움켜쥐었나> 를 낸 토마스 프랭크는, 캔사스의 농민과 노동자들이 이번 선거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모순적인 투표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을 옥죄는 정책을 추구하는 집단에게 지지표를 주었다는 것이죠. 즉, 대기업농 위주 정책으로 풀뿌리 농업을 황폐화시키고, 기업을 해외로 빼돌려 일자리를 줄이며, 노조를 뿌리부터 흔드는 정책을 추진해온 보수주의자들에게 피해 당사자들이 기꺼이 투표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들이 뭔가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런 투표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프랭크가 보기에 캔사스 사람들의 눈을 가린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극우적인 진행으로 악명 높은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 러쉬 림보 (Rush Limbaugh) 나 역시 악명 높은 폭스 뉴스 채널의 빌 오렐리 (Bill O’Reilly) 를 필두로 한 보수 언론이 줄기차게 진보 진영을 동성애자, 여성운동가, 무신론자들로 가득찬 부도덕한 집단으로 씹어댄 것이 순진한 캔사스 사람들에게 먹혔다는 것이지요. 네... 자신들의 형편없는 경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그들의 눈에 덧씌워져 있던 것은 바로 도덕이었습니다.

도덕 교과서 생각나세요? 혹은 바른생활, 혹은 윤리 교과서 말입니다. 얼핏 생각나는 주제만 따져도, 질풍노도의 시기 운운하는 청소년 문제부터 시작해 가치관, 세계 철학사, 종교와 인생, 한국 전통 윤리, 그리고 전체주의 윤리의 일환으로 들어간 반공 안보 교육과 남한의 통일 방안 변천사에 이르기까지 그 얼마나 폭이 넓었습니까. 이런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르는 도덕 중에서, 이번 미국 대선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하는 도덕적 이슈란 대체 무엇일까요.

문제를 단순화하는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딱 두 가지로 간명하게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동성 결혼과 낙태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22%의 사람들이 "도덕이 자신의 투표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들이 도덕이라고 말할 때, 다름아닌 동성 결혼과 낙태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울 것도 없는 이슈가 갑자기 되살아나 2004년의 선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많은 미국인을 도덕성이라는 자기 최면의 기치 아래 우르르 몰리게 한 것은 당연히 보수 성향의 복음주의적 기독교라는 매개체가 중간에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덕, 도덕성, 윤리관이라는 것의 내용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마련입니다.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는 엄청난 영역의 윤리 주제 중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살아갈 것인가는 개인에 따라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낙태를 태아에 대한 살해 행위로 생각하는 윤리 의식도 있을 수 있고, 여성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보는 윤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 배아 복제를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불손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복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과 보수 진영, 보수 기독교계는 이같은 입체적인 본질을 갖고 있는 도덕을 발로 확 밟아서 낙태와 동성애라는, 캔사스 시골 구석의 촌로들도 이해하기 쉬운 단순 명료한 단어로 찌그러뜨린 뒤 열심히 나팔을 불었고, 낙태와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만으로 높은 도덕성을 가졌다는 환상을 심어주었으며, 결국 성공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폭넓은 의미의 도덕 (종교 윤리적 도덕까지 포함하여) 은 깡그리 무시된 것이죠.

결국 "이번 선거에서 부시가 승리하였으며, 그것은 많은 미국인들이 도덕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아 투표했기 때문" 이라고 정리할 때에는 설명이 좀더 필요하게 됩니다. 부시의 승리가 도덕의 승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부시 진영이 두세 가지 이슈로 조작한 도덕주의의 환상에 눈먼 미국인들이 "밴드웨건을 타고" 우르르 몰려나와 투표하는 바람에, 더 큰 도덕적/종교적 가치가 마차 바퀴 밑 진창으로 처박힌 선거였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민주당의 가치관이 정말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도덕" 인가는 별개의 문제이고, 여기서는 다만 공화당과의 상대적인 차이만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 대선에는 도덕 논쟁과 관련한 몇 가지 변수들이 더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케리와 민주당에 대한 중부, 남부 사람들의 반감, 예컨대 "도시에 살며 라떼 커피를 마시고 볼보를 타고 다니며 점심으로 스시를 먹는" 전문직 종사자들에 대한 전통적 반감입니다. 이런 반감의 대상에 낙태와 동성 결혼 지지자들이라는 포장마저 덧씌워지자, 이 반감이 적극적인 도덕적 정당화를 갖게 됐으며, 이들이 당선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까지 피어올랐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케리와 민주당이 도덕 싸움에서 전략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진보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대선 이후 한 라디오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는 각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케리는 자기 일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를 돕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도덕 논란과 관련하여, 부시 진영의 말초적인 낙태/동성애 논쟁에 질질 끌려가기만 했을 뿐, 민주당이 제시하고 있는 훨씬 더 중요한 종교적이고 도덕적 가치, 말하자면 전쟁, 사회복지, 인권, 환경 같은 도덕적 규범을 적극적으로 들이밀고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번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도덕 논쟁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양 진영에서 주장하는 도덕이 중요한 차이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공화당과 보수 진영의 도덕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묶어서 자기 집단과 다른 집단으로 나누고, 다른 집단은 용인하지 않는 형태의 도덕인데 반해, 민주당과 진보 진영에서 말하는 도덕의 내용은, 비록 선언적 의미일망정, 사람들의 집단 소속에 관계없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아우르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자를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의 이분법적 가치관이라 한다면, 후자는 그래도 우찌우찌 함께 좀 살아보려고 기쓰는 가치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지난 선거에서 민주당은 젊은 층을 투표에 참여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는데, 정작 투표에 쏟아져 나와 두 번, 세 번 투표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도덕적 위기감을 느낀" 신실하고 순진한 서민들이었던 것으로 판명나고 있습니다. 비록 일부 미국 기독교인들이 이들에 대해, 정작 중요한 도덕 기준이 무엇인지는 판단하지 못하는 절름발이 도덕론자들이라고 비판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엄청난 도덕적 의무를 수행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상에 대해 "I am not sorry" 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위 사이트는 정신건강을 위해 들여다 보시지 않기를 권합니다. sorryeverbody.com 흉내를 내긴 냈는데 사진도 별로 없고 허접합니다. 전범 부시를 지지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뻔뻔한 얼굴과 가면이 몇 개 올라왔는데, 그 중에는 역시 "주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감사드려요" 하는 메세지도 있습니다. 가지 마세요...)



한편, <뉴욕 타임즈>에 나온 다른 분석을 보니 복음주의적 기독교 (Evangelical or born-again Christian) 뿐 아니라 개신교, 카톨릭, 유대교 전체에서 부시 지지율이 2000년 선거보다 높은 것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이 분석은 그 이유로 두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감리교 신자인 부시가 지난 4년 동안 종교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쫓아다니거나 백악관에 불러가며 챙긴 덕분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역시 동성애에 대한 반대였다고 합니다. 정치학자 존 그린은 교파에 관계 없이 부시를 지지한 범기독교 교인들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성 관념을 고수하려는" 것이었다네요.

낙태 문제나 인간 배아 복제 문제에 대해서는 이들 종교 안에서도 서로 이견이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두 이슈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이나 전통 카톨릭에서는 반대하지만, 정통 유대교에서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분석 말미에는 정통 유대교 지도자의 코멘트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책을 앞표지부터 뒷표지까지 달달 외우고 다니는 복음주의자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공통점은 개인의 삶과 지역 공동체의 생활에 종교적 신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바란다는 것이지요."

네... 종교 신념이 개인과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되, 그 내용은 전혀 비종교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더 큰 종교적 도덕과 윤리를 외면하고 덜 시급한 가치에만 매달려 희대의 전범을 다시 우두머리로 뽑은 이번 선거에서처럼 말입니다.

덧글

  • isanghee 2004/12/04 06:39 # 삭제 답글

    네. 선거율 높아진 것 만큼 부시의 지지율이 높아졌다해도 과언이 아니겠더라구요.
  • happyalo 2004/12/04 10:25 # 답글

    전에 선거 직후에 썼던 짧은 글과 통하는 듯하여 트랙백을 걸어 둡니다. 사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건데 트랙백이 아니라 반대 개념이 필요한데...
  • deulpul 2004/12/04 12:38 # 답글

    isanghee: 미국 젊은 눔들, 한국에 와서 한 수 배우고 갔어야 했던 게 아닌가 몰라요. 토플토익 값보다 훨씬 싸게 가르쳐줄 수 있구만...

    happyalo: 가서 잘 보았습니다. 트랙백이든 트랙천이든 잘 연결되어 좋은 글을 읽을 수 있으면 되지요~. 미리 알려주셨다면 안 썼을 껄. 하하-
  • 강직 2004/12/07 22:19 # 답글

    참 신기하군요, 저도 예수님 믿지만 부시는 싫던데. 우리 나라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이 되었든지 일단 되고 나면 지혜롭게 정치를 잘 하도록 기도해 주고 있습니다. 잘 되어야 할텐데...
  • deulpul 2004/12/08 09:58 # 답글

    강직님 기도가 통해, 밖으로는 평안하고 안으로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헤르시즈 2004/12/09 06:21 # 답글

    오늘로 이 글을 세번째 읽습니다. 순식간에 저는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거로군요.. (웃음) 좋은 글 감사합니다.
  • deulpul 2004/12/30 12:31 # 답글

    비도덕이 도덕이 되거나 도덕이 비도덕이 되거나, 둘이 서로 헷갈리고 혼동되는 우리 시대란 참 혼란스럽습니다. 인류사에 언제는 안그랬던 적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요... (엄청 늦은 답글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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