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부정 사태와 관련한 단상 몇 가지

2005년 대학 입시를 온통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시험 부정행위 사태를 보자니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이 몇 가지 있습니다. 논리적 흐름 없는 단상들입니다.

1. 규범적인 문제로 토론이 벌어지던 어떤 게시판에서 본 일입니다 (규범적인: 인간이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가치 판단의 기준과 관계된 - 국어사전). 한 원칙적인 문제를 놓고, 그렇게 해야 하느냐, 아니면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느냐 하고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는데,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모두 원칙대로만 사는 사람이 누가 있냐. 학생 때 컨닝 안해본 사람이 누가 있냐."
매우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사례 자체야 진부한 것이지만, 그의 말이 놀라웠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그가 세상 모든 사람이 잘못됐지만 손쉽고 편한 길을 따라 가며 산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었고 (인식), 둘째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치관). 더구나 그는 앞으로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신분의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2.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종종 대학교 때 같은 학과 동기생이었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는 여학생이었는데, 시험 때마다 부정행위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 너무 표나게 하니까 학과 친구들도 다 알지만, 이력이 난 탓인지 감독 조교나 교수들에게는 거의 들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소 교수들하고도 기가 막히게 친한 관계를 유지해서, 혹시라도 부정행위와 관련한 나쁜 소문이 돌면, 교수들은 "에이... 걔가 그럴 리가 있어?" 하고 변호해줬다고 합니다. 그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녔고, 졸업 성적도 좋아서 좋은 데 취직을 했다고 합니다.

3. 제가 잠깐 있었던 미국의 한 대학에서는 명예 수칙 (honor code) 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학칙 비슷한 것인데, 거의 사문화되어 있는 바람에 존재조차 아리송한 한국 대학들의 학칙과는 달리, "대학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꼭 준수해야 할 사항들" 같은 개념으로 항상 강조되었습니다.

어떤 수업이든 수업 첫 시간에 배포되는 강의 계획서 맨 뒤에는 "이 수업에는 명예 수칙이 적용됩니다. 대학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학생과 교수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이 명시된 강의 계획서가 배포되고 학생들이 이의없이 받아드는 것으로,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해당 수업과 관련하여 부정행위 등 학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고, 교수도 공정하고 평등하게 수업을 진행하고 성적을 매길 것을 서로 서약한 효력을 갖게 됩니다.

그 덕분인지, 강의실 책상에 수학 공식 하나 적힌 것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페인트 덧칠을 하는 덕분인가...) 제가 떠날 즈음에, 한 교수가 자기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 일부를 부정행위 혐의로 학교 당국에 제소하여 한창 논란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개인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컴퓨터공학 수업 프로젝트를 학생 몇 명이서 공동으로 진행했다는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4. 영화 <나비 효과> 를 보면, 대학생인 주인공이 심리학 시험을 보러 들어갔는데, 친구가 "컨닝 페이퍼" 를 작성해 건네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간편한 방법에 대한 유혹은 어느 사회의 학생이든 마찬가지로 느끼는 모양입니다. 문제는 이 유혹에 대한 용인의 정도, 저항력의 강도, 유혹에 무너진 사람에 대한 동료 그룹의 태도 같은 데서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다음 장면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시죠? (주인공이 제정신 못차리고 헤매는 상황이라 약간 다르게 해석될 여지도 있지만, 비슷한 장면을 옛날에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에서도 본 것 같습니다.)

5. 자신이 한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지 못한 일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노력을 덜 했으면 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게 싫으면 죽어라 노력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노력은 덜 해놓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기도는 할 수 있을지언정, 아름답지 못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열심히 노력한 남에게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욕보이는 일이 됩니다.

6. 사회적 파장이 큰 문제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흔히 사회 구조를 떠올립니다. 이번 입시 부정에서도 "과열되고 혼동스러운 입시 제도에, 학력이 만능인 사회 구조" 를 그 원인으로 설정하면 매우 간편하게 문제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희대의 범죄자 유영철도 똑같이 사회 구조의 희생양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과거 엽기적인 범죄 행각으로 크게 화제를 몰고 왔던 "지존파", "막가파" 때, 각종 전문가들이 앞다투어 쏟아져 나와서, 이러한 범죄를 낳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입을 모아 성토했습니다.

분명 그런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조정래의 글에서처럼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회 구조에서 일탈과 비일탈이 동시에 존재하는 점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똑같은 입시 구조 안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은 빈부 격차의 구조 안에서 사람을 쳐죽이고 토막내 불태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낳는 것일까요? 양심의 차이인가요? 담력의 차이인가요? 기득권의 차이인가요? 어떤 것이든, 구조에만 주목하면 그 차이를 무시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얼핏 개인만의 잘못으로 보이는 행위 뒤에, 개인을 그같은 잘못으로 내모는 구조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구조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은 바로 이같은 인식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잘못된 구조에 대응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규범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동 자체에 대한 성찰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조가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행동을 하도록 몰고 갔다고 해서 그 잘못된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7. 이런 행위의 문제는 특히, 한 측이 부정을 저지르면 다른 측이 피해를 보게 될 때 더 큰 중요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 대부분이 그같은 제로섬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 엮여 있습니다. 예컨대, 돈을 번 만큼 제대로 세금을 내지 않는 한 전문직 종사자의 "절세 비결" 은 나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득이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나와 같은 근로소득자들이 그가 내지 않은 세금을 나누어 내는 꼴이 됩니다. 각종 시험의 부정행위도 비슷합니다.

이런 점에서 "컨닝" 이든 탈세든 대부분의 부정행위는 본질적으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가해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이 그에 따른 보상을 얻는 대신, 그 피해는 정태춘의 노래에 나오는 "양심을 지키는 가난한 이웃들" 에게로 돌아갑니다.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 측은 다만 양심적이고 신념을 지켰다는 이유로 피해를 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8. 이런 점을 들여다보다 보니, 결국, 부정한 방법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인식 구조가 더 큰 문제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잘못됐지만 편한 방법이 생활의 지혜로 널리 채택되고 권장되는 사회,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속편한 편의주의가 만들어 내는 도덕 불감증 말입니다.

나라를 팔아서 배를 불리던 자들이 자손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풍찬노숙하던 이들의 가난한 후손이 처세에 무능한 아비를 두었다고 뒤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총칼로 집권한 뒤 반대자들을 눈하나 깜짝 않고 고문하고 죽이고 교수대로 줄줄이 보내고도 측근 졸개들과 그 딸까지 독재자의 이름을 팔아먹으며 수십년 동안 지도자로 거들먹거리며 살고 있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눈물을 빨아들여 키운 기업을 연예인과 결혼하는 자식들에게 물려주며, 가진 자들보다 헐벗은 이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이 기형적 사회에서, 입시에 내몰린 고교생들이 시험에서 부정행위 좀 한 것 정도는 정말 사소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은 성적 순이야!" 하며 그들을 키워놓은 우리 사회가, 과연 그들의 절박한 심정에 자신있게 회초리를 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9. 무슨 일이든 지역성에 주목하는 희한하게 진화(라기보다 퇴화)한 눈을 갖고 있는 덜떨어진 인간들은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윗 사진 출처: www.dcinside.com 의 짤방 므흣 시리즈 중에서)

덧글

  • happyalo 2004/12/08 10:07 # 답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시리즈 중 한 권을 읽으며(아니, 오디오 북으로 들었던 건지도) 들었던 기분 나쁨의 근원은 그 얘기의 상당 부분이 탈세하라 였기 때문입니다(절세인 척도 별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서 보며 베스트셀러가 됐지요(결국 그걸 팔아먹은 그만 더욱 부자가 되었겠지만). 내가 노리는 불로소득은 늘 누군가의 손해 위에서 얻어진다는 거, 다시금 생각하게 되네요.
  • 미나토모 2004/12/08 12:39 # 답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5,6,7번에 강하게 동의합니다.

    약간 주제넘을지도모르지만 무지렁이인 저의 졸견을 짤막하게 표현하자면,
    이 일때문에 공식점수발표가 늦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이렇게되면 정시 알아보는 학생들이 또하나 혼란을 겪게 되겠는데말입니다.... 사회잘못이다 뭐다 하는 소리는 이해해도 적어도 정시모집 등 이후 전체적인 입시스케줄에 혼선을 빚은 이번사건의 1차적책임은 분명히 1000여명 이상의 치터들에게 있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수능부정으로 인하여 다수가 피해를 입은건 사실이니까요.
  • 유월이 2004/12/09 01:27 # 답글

    (이오공감 보고 오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생각해보고 삶을 반성해 보아야 겠다고 느끼지만 과연 제 자신이 언제나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없달까요. 행동하나하나에 대해 자잘못을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가려고는 하지만 세파에 점점 물들어 다른 사람이 될듯한 기분입니다. 이것도 무언가 변명 같이 보이지만요.
  • Noche 2004/12/09 02:02 # 답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과 개인 행동에 대한 성찰 두 줄기가 잘 맞물려 있는 멋진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honor code에 대해서는 솔직히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시험감독 할 때 조교와 선생님들은 강의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컨닝하기는 너무나 좋은 환경이거든요. 과연 애들이 얼마나 자신의 도덕성에 비추어 행동을 결정할는지. 실제적 이익이 눈 앞에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말이죠. 아무튼, 미국은 뭐 어떻게든 굴러가라고 치고, 우리나라 사회의 도덕불감증에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올해 저렇게 잡혔으면 그전에는 대체 몇 건이나 있었다는 이야기인지... 정직과 양심을 팔아먹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직과 양심을 지키는 것이 쪽팔려지는 사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오냥 2004/12/09 02:58 # 답글

    같은 과에서 공부했던 동기중에도 3번 같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었는데, 역시 그 분도 교수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국내 굴지의 기업에 입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었던 것은 컨닝을 보다못한 학우가 1학년 말인가 2학년 초에 조교수에게 그 사실을 고해바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교수에게 '컨닝도 실력이다' 라고 대답을 들었다고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대체 어떻게해야 하는 걸까요.
  • 하늘바라기 2004/12/09 10:16 # 답글

    이오공감 타고 놀러 왔습니다.
    "세상에 모두 원칙대로만 사는 사람이 누가 있냐. 학생 때 컨닝 안해본 사람이 누가 있냐." 이라는 말... 상당히 신경쓰이는 말이네요... (아.. 절대 이 포스트의 글에 대해서 신경이 쓰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
    "세상 누구나 원칙을 벗어나서 편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냐. 그렇다고 원칙을 벗어나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 라는 말이 일반적인 얘기가 되는 사회가 되어야 겠죠..
  • young_gean 2004/12/09 10:54 # 답글

    우선 deulpul님의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그치만 그 내용이 너무나 '정체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원인을 찾는 것과 개별적 인간성(?)의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는 방식은 둘 역시 분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즉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주장을 해보자면, 아무리 총론과 각론이라는 두 차원에서의 비판을 따로따로 (편하게) 감행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걸음씩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방법론은 결국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총론 차원의 문제를 각론 차원의 개별적 인간의 문제로 '유기적으로' 풀어나가는데 있다는 것이지요.제 생각에 이번 수능부정행위건에 나타나는 주요문제들은 사회구조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훨씬 유효하다고 보여집니다. 때문에 이번 사건에 대한 해결책도 근본적으론 "과열되고 혼동스러운 입시 제도에, 학력이 만능인 사회 구조"에서 찾아야하겠고 따라서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강력한 개혁이 가장 우선시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가장 쉽고 편한' 일이야말로 "덜떨어진 인간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그들을 처단(?)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오리대마왕 2004/12/09 10:59 # 답글

    저도 바로 윗분 말씀에 공감합니다.
    저는 컨닝 해 본 적이 없거든요 ^^;
    어떻게 저런 발언이 공공연히 나올 수 있는지 자체가 어이없을 따름입니다.
    다른 부분들은 도덕적인 면에 국한된다고 100번 양보해도 7) 번 케이스에 대해서는 발끈! 하게 되지요.
    이번 수능부정자들도 당연히 사법적인 처리르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 eddu 2004/12/09 11:16 # 답글

    우리나라 어떤 대학도 시험감독을 전혀안하고 양심적으로 시험을 보는 대학이 있다고 하더군요...
  • deulpul 2004/12/09 13:58 # 답글

    답글이 너무 길어져서 아예 독립 포스팅으로 올려두었습니다.
  • CN 2005/08/18 08:34 # 삭제 답글

    "세상에 모두 원칙대로만 사는 사람이 누가 있냐. 학생 때 컨닝 안해본 사람이 누가 있냐."라고 말하면 "커닝 안해본 사람 여기 있다."라고 말하면서 한 대 때려줘야 할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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