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왕>: 질주하는 타이거 마스크 비칠映 그림畵 (Movies)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 마음을 꺼내지 못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억지로 용기를 내기도 하고, 또 간혹 포기하고 아파하기도 합니다. 은행원 임대호는 가면을 쓰는군요.

어두운 저녁, 주택가 골목길을 조은희가 걸어옵니다. 힘들게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오자, 한 남자가 가면을 쓰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같은 은행에 근무하는 임대호입니다. 가면은 임대호가 막 시작한 레스링에서 반칙왕 캐릭터로 등장할 때 쓰는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입니다.

임대호가 말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복면을 쓰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랑했구요, 앞으로도...

한없이 무력한 은행원 임대호에게 또다른 모습을 안겨주는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 마스크를 쓰면 그는 사각의 링에 우뚝 서서 유혈낭자한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서, 비록 더듬거리면서라도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도 마스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마스크의 힘도 사랑을 얻는 데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쌀쌀한 목소리가 임대호의 말을 자릅니다. 잠깐. 지금 무슨 말 하세요? 술 마셨어요?

뒤로 감춘 손에서 꽃다발이 떨어집니다. 뒷걸음질을 치는데 꽃이 밟힙니다.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부당한 뒤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달려가 숨는 것 말고는. 갑자기 몸을 돌린 임대호, 달리기 시작합니다. 주택가를 달리고 거리를 달리고, 불이 휘영청 밝은 광화문 앞 대로를 마스크 머플러를 휘날리면서 달립니다.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쓸쓸한 거리를 질주하는 사내의 구둣발 소리에 화답하듯 음악이 나옵니다. 이은하가 불렀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의 한 소절입니다. 이은하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 영화에서 음악을 맡은 어어부 프로젝트의 백현진의 목소리입니다.

"그대 왜 나를 그냥 떠나가게 했나요. 이렇게 다시 후회할줄 알았다면...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피아노 반주에 실린 백현진의 걸쭉하게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구겨진 마음을 안고 질주하는 임대호의 마음을 아프도록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윽고 임대호는 안국동역 쯤일 지하철 역 플랫폼에 좌절한 채 앉아 있습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임대호는 노래가 잦아들자, 한숨 한 번 쉬고 양 손으로 무릎을 한 번 탁! 치고 벌떡 일어섭니다. 네... 언제까지나 좌절한 채로 있을 순 없습니다. 또 새로 시작해야 하니까요. 더구나 그는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반칙왕>, 2000년, 1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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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목소리와 저 음악이 정말 좋았습니다. "미소를..." 을 백현진이 녹음한 게 있나 찾아봤더니 저 영화 장면에서만 잠깐 쓰이고 따로 녹음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반칙왕> 사운드 트랙에도 빠져 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배경으로 나오는 거리가 열심히 쏘다니던, 심지어 술마시고 편안하게 자기도 하던 낯익은 곳이라서 또 반가웠습니다.


 

덧글

  • 누드모델 2004/12/30 15:37 # 답글

    음... 탁 치고 일어나서 참 다행이지만 그래도 쓰린 장면이군요...
  • deulpul 2004/12/30 20:15 # 답글

    네... 오랜 짝사랑을 그렇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툴툴 털고 일어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안쓰러웠습니다.
  • 정엽 2004/12/31 20:35 # 삭제 답글

    반칙왕이 가진 열정. 그 열정때문이라도 짝사랑은 추억이며 그 사랑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일 듯 합니다. 마치 우리 인생처럼...
  • deulpul 2005/01/05 03:08 # 답글

    한 열정(사랑)의 끝에서 다른 열정(레슬링)의 시작을 보다니, 정엽님의 안목도 놀랍습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여행기도 곧 들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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