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 날리는 저녁

날은 찬데, 바람이 자고 세설(細雪) 눈발만 소소히 나리는 저녁이라, 천천히 집으로 걸어왔습니다. 걸어서는 한 시간 좋이 되는 길이지만, 그럭저럭 걸을 만한 길이 갖추어야 하는 것들을 대충 갖추고 있는 길이라서, 바쁘거나 몸에 달린 짐이 무겁지 않으면 가끔씩 걸어 옵니다.

남들이 바삐 뛰고 달릴 때, 천천히 걷는 건 참 즐겁습니다. 그냥 지나쳤던 길가의 미물들도 조심스레 살펴볼 수 있고, 길 따라 언덕 따라 이런저런 생각도 피었다가 스러지며, 아무도 모르게 노래도 흥얼흥얼 합니다. 마음 먹은 대로 움직여주는 두 발과 두 다리가 새삼 기특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입니다.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장수나 생선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젊은 손수운전자에게> 중에서, 김광규)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닙니다. 촌구석에 살면서 촌놈이 다 되었는지, 버스를 타면 가끔 심하게 어지럽습니다. 특히 차 안에서 뭔가 활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영락없습니다. 그래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어야 합니다. 창밖에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밤에도 그래야 합니다. 이것이 버스를 타야 할지 그냥 걸어가야 할지 망설이게 되는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난 여름, 광화문에서 술자리가 파하고 나서 친구들이 모두 심야 할증 택시를 타고 각기 집을 향해 떠난 뒤, 종로를 거쳐 대학로와 삼선교를 지나 돈암동까지 천천히 걸었습니다. 철부지 시절부터 누비고 다니던 그 길을 오랜만에 소요(逍遙)하자니, 비록 공기는 텁텁하고 날은 오밤중까지 무더웠으나, 행복했습니다.

오늘은 동지섣달 치고는 바람도 그다지 심하지 않고 버스도 한참 기다려야 할 판이므로, 신발 끈을 고쳐매고 그냥 천천히 걷기로 합니다.

눈이 흩날렸습니다. 어둑한 곳에서는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느낌으로만 느껴지던 눈발이, 가로등에 가까이 가면 모습을 드러냅니다. 할로겐 가로등 밑에서 눈발이 가만히 날립니다. 지난 여름에도 같은 자리에 비슷한 군무가 벌어졌었습니다. 그 때 불빛 아래 날리던 것은 곤충들이었습니다. 눈발은 작은 곤충들의 어지러운 움직임과 흡사했습니다. 다만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아래에서 위로 날아오르지는 않았습니다.

어릴 때, 함박눈이 펑펑 오는 날,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 봅니다. 시야에는 나무라든가 지붕 처마라든가 하는 것들이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하늘만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잿빛 하늘 아득한 곳에서 수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면, 이윽고 나의 발은 땅에서 떨어지고 몸은 저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쏟아지는 눈 탓에, 내가 날아 올라가는 환각을 갖게 되는 거지요. 날개를 움직이지 않아도 신나게 하늘로 올라 갑니다.

이제 나의 손을 잡아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 있다면
("마법의 성" 에서)

이제는 안경을 쓰고 있어서, 눈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에 안경 위에 눈물이 먼저 어립니다. 눈이 나빠지면서 언젠가부터 은하수를 볼 수 없게 된 것을 깨달은 때처럼, 속이 헛헛합니다.

그래도 입으로 들어오는 눈 맛은 어릴 때나 꼭 같습니다. 혀 끝에 닿는 그 눈 맛에 힘을 내고 다시 걷습니다.

길 중간중간에, 눈을 덮어쓰고 있는 얼음이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신나게 달려와 쭈르르 미끄럼을 타기 딱 좋은 놈들입니다. 함께 웃고 떠들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쭈르르 미끄럼을 탈 동무가 곁에 없음을 잠깐 서글퍼하다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지납니다.

저 멀리에 짐승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갑니다. 개처럼 보입니다. 이 곳에서 사람과 함께 다니지 않는 개는 참으로 보기 어려운데, 저녁 나절에 무슨 볼일이 있었던지 혼자서 마실을 갔다가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개가 종종걸음치던 곳에 가까이 가니, 개는 사라지고 발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별로 커 보이지 않는 개도 발자국은 이렇게 크게 남는구나, 하고 놀랍니다. 그리고 내 발자국을 돌아봅니다.

솔미미미미 파파미도미 레레미레 도레도 라라라미라
솔미미미미미 라솔파미 레도레솔 미레도라 솔라도라솔도


한참을 개 발자국과 함께 걸어오다, 개가 곁길로 들어가는 바람에 헤어졌습니다. 사람의 집으로 가까이 오니 온기가 느껴집니다. 집에서 비쳐나오는 불빛이란 역시 형광등보다 백열등이어야 할 일입니다. 백열등은, 차갑고 파리한 형광등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함과 풍부함을 안겨줍니다. 사람들의 소리와 백열등의 따뜻한 빛이 어울려 나오는 사이를 걸어와, 집에 다다랐습니다. 모자를 벗고 어깨를 툭툭 쳐 눈을 털어내면서, 작은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덧글

  • 삼나무 2005/01/06 00:33 # 답글

    인적이 드문 밤, 눈덮인 길위에 발자국을 만들며 한적하게 산책이라도 다녀온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깨위에 내려앉은 눈을 툭툭 쳐내면서, 적잖이 행복하셨는가 봅니다. 올겨울 서울에 눈이 귀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아쉽습니다^^
  • happyalo 2005/01/06 01:10 # 답글

    전문적인 글 못지않게 개인적인 글도 참 맛깔스럽게 쓰십니다.
    걸으면 많은 걸 볼 수 있다는 것에 동감되네요. 걸으면 나뭇잎 하나하나 색감이 다 다르다는 것 같은 일견 사소할 수도 있는 것들로도 자연의 위대함에 대해 느낄 수 있죠.
    맨 아래 곡이 뭘까 머리 속으로 음을 잡아봤는데 별반 뛰어나지 않은 음악성 탓에 음의 길이가 안 잡히면서 곡이 얼른 안 잡히는군요.
  • deulpul 2005/01/11 21:43 # 답글

    삼나무: 재작년인가는 서울에 눈이 너무 많이 쏟아져서 고생들을 많이 하셨죠. 해마다 딱 적당한 만큼씩만 보내주시면 좋을텐데요~.

    happyalo: happyalo님 음악성 때문이 아니라, 띄어쓰기를 마음대로 해 둔 탓인 것 같습니다, 하하-. 동요를 떠올리자니 갑자기 옛날 교실에서 풍금에 맞춰 계명으로 노래 배우던 생각이 나서요... [하얀 눈위에 구두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발자국 그 누가 새벽길 떠나갔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발자국]
  • 강인규 2005/01/14 14:13 # 삭제 답글

    위에 쓰신 글을 읽고 있자니 오랫동안 잊혀졌던 눈에 대한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눈발처럼 하나 하나 떠올랐습니다. 시간은 마음의 여린 살갗에 서서히 굳은살을 만들어 가는것 같습니다. 눈송이 하나에서 무수히 많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소년의 마음으로 평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형의 글을 읽고나니 갑자기 노천명의 '설야산책'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첫 눈과 같은 기쁨을 주신 아름다운 글, 감사드립니다.
  • deulpul 2005/01/15 22:09 # 답글

    항상 열심히 쓰시고 있는 줄은 알지만, 그렇게 또 따로 모아 놓으니, 하이구, 언제 저렇게 다양한 일들을 요모조모 예리하게 다 들여다 봤을까 하고 새삼 놀라오. 그런데 왜 그 네이*에 둥지를 트셨을꼬. 그나저나 이거 신년 하례회가 늦어지네요. 끙... "설야산책" 찾으러 가면서... 요즘은 옛날 본 건 까마득해 기억이 안난단 말이오... (읽고 와서) 여전히 좋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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