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섞일雜 끓일湯 (Others)

'The Price is Right' 는 평일 아침에 CBS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가격 맞추기 프로그램이다. 몇 달러짜리 살충제나 세제에서부터 수만 달러짜리 자동차나 요트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을 스튜디오에 끄집어 내어 놓고, 방청객 중에서 무작위로 뽑힌 사람들이 그 값을 맞추면 가져가는 일종의 게임 쇼 프로그램이다.

물론 상품은 제작사가 협찬하는 것들이고, 그 제품들이 텔레비전에서 소개될 때 보면 홍보도 이렇게 좋은 홍보가 없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상업 광고를 상업 텔레비전의 정식 프로그램으로 승화시킨 기막힌 미국식 자본주의적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쇼가 1972년에 시작된 이래 33년 동안 장수하는 비결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방청객 중에서 뽑힌 네 사람이 각기 값을 맞추는 퀴즈에 나서며 경쟁하는 예선에서 가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예컨대 고급 식탁이 나왔다고 치자. 사회자는 값을 감춘 채, 이 값을 네 명의 참가자에게 추정하게 한다. 실제 값에 가장 가까운 값을 부른 사람이 본선에 나가는데, 실제 값을 초과하면 안된다.

네 사람이 순서대로 각기 값을 부르는데, 가끔 A는 700달러, B는 701달러, C는 702달러, D는 703달러와 같은 식으로 값을 부르는 경우가 벌어진다. 이 경우, 실제로 A, B와 C가 예선에서 뽑힐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된다. 맨 마지막에 값을 부른 D가 승리하거나, 아무도 승리하지 못할 가능성밖에 없는 꼴이 된다. 왜 그럴까?

실제 값이 699달러 이하이면, 모두 값을 초과해 불렀으므로 모두 실격이 된다. 실제 값이 703달러 이상이면 D가 승리한다. A, B, C는 자기가 부른 딱 그 값이 아닌 한 승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A가 700달러를 부르면, B는 안면 몰수하고 701달러를 부름으로써 A의 가능성을 팍 줄여버린다. 그럼 다시 C 역시 얼굴에 철판 깔고 702달러를 부름으로써 B도 확 밟아버린다. D 역시 마찬가지.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대상 상품에 대해 참가자들의 가격 추산이 꽤 달라서 가격 차이가 벌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함께 게임에 참여하는 상대방을 고려해서 그렇게 짓밟기 스타일로 잘 나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임 참가자 간의 예의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저런 경우란 인간성 더러운 이웃을 만난 경우에나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꼭 저런 스타일을 보여주는 참가자들이 있다. 무대 앞에 나와서는 서로 악수하고 부둥켜안고 친한 친구처럼 굴지만, 막상 게임 시작되면 안면 몰수하고, 자기는 머리 하나도 굴리지 않고 그저 앞사람 따라 가면서 앞사람을 콱 짓밟아 버린다. 이런 식으로:




게임 규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므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참가자 간에 암묵적으로 회피하는 관습처럼 되어 있으므로, 인간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얼굴 표정과 행동거지, 심지어 체형과 낯빛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관찰하면서, 오로지 자기가 승리하기 위해, 수천만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비겁하고 뻔뻔하게 남을 뭉개버리는 스타일의 사람이 어떤 종자들인지 연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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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개그맨 전유성이 다음과 같은 제목의 책을 펴낸 적이 있다: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책 제목만 보자면, 정말 명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옳아서가 아니라, 얼핏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정말,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일들에서,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조금만 눈감아주면 삶이 평화롭고, 조금만 못본척하면 생활이 윤택해진다. 조금만 뻔뻔하면 좋은 자리 차지할 수 있고, 조금만 두꺼우면 주머니가 두둑해진다. 조금만 비굴하면 배가 부르고, 조금만 비겁하면 등이 따습다. "지금 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여, 나를 마음껏 비웃고 침뱉으라. 언젠가 당신들은 내 자리와 나의 성취와 나의 명성과 월급봉투와 예금통장을 부러워하게 될 테니!"

그러나 말이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도 될 것인가. '조금'의 정의(定義)는 한없이 타협적이며, 비겁의 대가로 누리는 즐거운 인생은 한없이 경박해 보인다. 그리고 그 즐거운 인생 뒤에는 대부분 누군가의 상처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런 인생을 즐거운 인생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한없이 불쌍하게 보인다. 나 역시 인생을 내 식대로, 자유롭고 즐겁게 살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 중 하나지만, 비겁하고 비굴해져가면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저 전유성의 책의 제목만 얻어 듣고 인상적이라고 생각했을 뿐, 책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전유성이 실제로 저런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책 제목으로만 저렇게 썼는지도 알 수 없고 관심도 없다. 그저 한때 저 제목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다. 귀를 씻지는 않았다.

손을 조심하고 발을 삼가하며 남의 그림자에라도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은, 조금만 비겁해짐으로써 인생을 즐거이 살려는 이들이 가질 수 없는 축복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조심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성취야말로 정말 값진 것이라고 믿는다.


※ 이미지: 한 출연자 블로그, 나중에 덧붙임

 

덧글

  • happyalo 2005/01/26 12:57 # 답글

    예...
  • 2005/01/27 15:09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시노조스 2005/01/31 16:25 # 답글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 전유성이 그런 말을 했던 것이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저 말을 혐오합니다.

    그런데 위 TV프로그램의 방식을 차례로 부르는것이 아닌 종이에 써서 한번에 공개하는 방식으로 바꾸면 공정하게 될 것 같군요.
  • 2005/02/01 23:2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deulpul 2005/02/04 02:12 # 답글

    happyalo:고맙습니다.

    시노조스: 그렇군요. 역시 게임 쇼든 사회든 시스템을 잘 조정하면 불필요한 마찰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그런 좋은 방법이 있는데 왜 저 낡은 방법을 고수하고 있는 걸까요. 아무래도 저런 류의 치고박기도 볼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익명 두 분께는 다른 방법으로 답을 드립니다.
  • 치즈양 2005/02/19 01:07 # 답글

    아아. 벨리에서 보고 왔다가, 오늘 마침 비굴에 관한 글을 하나 써서 대조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비굴.비겁.비쿨- 한끗차이지만 마음가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deulpul 2005/02/22 16:40 # 답글

    소개해주신 "비굴 리스트" 를 봤는데, 그 정도라면 비굴이라고 하기엔 너무 건전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뻔뻔하고, 외면하고, 다른 사람 짓밟으면서 비굴해지지는 않는 것이니 말여요. 정말 be cool 한 비굴인 것 같네요. 쓰신대로, 얼마든지 권장할만한 비굴(?) 이 아닐까요-.
  • hicari 2011/08/17 11:13 # 삭제 답글

    찾아보니 절판된 책이군요 ^^;
    예전에 읽었는데 제목만큼 더러운(?) 내용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겁하다는게 상식을 깨는 것에 가깝게 쓰였죠.
    하지만 써 놓은신 걸 보니 제목이 참 가관이긴 하군요. (그래서 절판일지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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