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 의 죽음에 감추어진 진실 미국美 나라國 (USA)

왼쪽은 팻 틸만 (Pat Tillman) 이라고 하는 미국 젊은이다. 단단한 근육과 우람한 체격, 강인한 인상 때문에, 얼핏 보기에도 무슨 운동 선수나 군인 같은 인상을 풍긴다. 사실 틸만은 운동 선수이기도 했고 군인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묘사가 과거형인 것은 그가 일년 전쯤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프로 미식축구 선수였던 틸만은 2001년 9-11 사건이 난 뒤, 스스로 군대에 자원 입대하겠다는 놀라운 결정을 발표했다. 온갖 형태의 분노, 증오, 두려움과 전례없는 맹목적 애국주의에 물들어 있던 수많은 미국인들은 틸만의 결정에 놀라워하며 그의 애국적 결단을 칭송하고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미식축구, 그 중에서도 스타급 선수, 전쟁, 입대, 애국... 일부 미국인들이 미치다시피하는 정치사회문화적 키워드를 총망라해 구현한 틸만의 입대는 보복 전쟁의 기운이 물씬물씬 피어오르던 미국 사회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더구나 틸만의 입대 결정은 애리조나 카디널스와의 3백60만달러짜리 계약을 포기하면서 내려진 것이어서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자기 희생 위에서 국익을 돌보는 이 시대의 진정한 전사' 라는 칭송을 받았다. (9-11 때문에 열받은 상태에서 부시의 프로퍼갠다에 넘어가,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 중동의 민간인들에게 총질을 하러 떠나는 바보라는 비난도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생긴 것처럼 우직한 그의 결정은 전쟁을 위해 우호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켜야 했던 부시에게는 정말 고마운 일이었을 것이다.
매 앞에는 장사 없다고 한다. 총알 앞에서는 전사도 소용없던 모양이다. 틸만은 육군에 입대한 뒤 그 유명한 레인저 대원이 되어, 이라크를 거쳐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됐다. 일년 전인 2004년 4월22일, 틸만은 동료들과 함께 파키스탄 국경에 가까운 아프가니스탄 계곡의 지방도로를 이동하다가 적과 조우했다. 암석 뒤에서 엄호를 하던 틸만은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맞아 절명했다. 전혀 쓰러질 것 같지 않았던 이 시대의 람보는 어느 초봄 저녁 무렵에 황량한 아프간의 계곡에서 어이없이 쓰러졌다. 당시 27세.

틸만이 적과 교전하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여론은 또 한번 들끓었다. 많은 언론들은 틸만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는 최고의 칭송을 그의 죽음에 헌사했다. 모든 특혜를 떨쳐버리고 전쟁에 자원하여 나가 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틸만은 국가를 위한 영웅적 희생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그의 사망을 전하는 기사들은 '용기, 용맹, 영웅, 위대한 소명, 애국적 가치, 희생' 같은 말들로 가득 찼다. 틸만의 장례식은 2004년 5월3일 고향인 캘리포니아의 산호세에서 웅장하게 거행됐다. 장례식 장면은 전국에 생중계됐다. 사망한 틸만에게는 은성무공훈장과 퍼플 하트가 수여되고 계급 특진까지 주어졌다.

서너 주 뒤, 미국인들은 영웅 틸만의 죽음과 관련하여 기막힌 소식을 들어야 했다. 틸만을 절명케 한 총탄이 적진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라 동료 군인들의 사격에 의한 것 같다는 육군 당국의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영웅은 아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던 것이다. 5월29일 발표된 군 당국의 조사 결과는 아군 총탄에 맞아 숨진 것 '같다' (likely to died of friendly fire) 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써서, 이 기막힌 소식이 영웅의 화려한 죽음에 던질 그림자를 최소화하려는 안간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일년 뒤인 어제, <워싱턴포스트> 는 자체 입수한 군 당국의 새 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또 한 가지 기막힌 소식을 전했다. 군 고위 지휘관들은 틸만이 적과의 교전으로 숨진 것이 아니라 아군의 사격에 숨졌다는 사실을 사고 직후 곧바로 인지했으나, 이 사실을 일부러 오랫동안 감추어 왔다는 것이다.

2000 여 쪽에 이르는 새 보고서에 따르면, 군 고위 당국자들은 틸만의 영웅적인 장례식이 거행되기 나흘 전에, 틸만의 사망이 '총체적 태만' (gross negligence) 에 의해 벌어졌다는 자체 조사 보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이러한 사실을 언론은 물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덕분에 틸만은 흉악한 테러리스트 집단과 용감히 맞서 싸우다 적의 총탄에 사망한 전사가 되어 땅에 묻혔다.

당시 사고 현장에 함께 있던 동료 군인들은 틸만이 아군의 집중 사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사고 직후 곧 알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은 모두 무시됐다. 지휘관들은 아군에 의해 사망했음을 감추기 위해 틸만의 보호 장구와 군복을 불태워버렸으며, 틸만과 함께 육군 레인저 부대원이 되어 사고 현장 근처에 있었던 틸만의 동생에게조차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러한 조작의 결과, 틸만은 교전중에 적군의 사격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거짓 보고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보고에 근거해 각종 훈장까지 수여된 것이다.

진실을 오랫동안 은폐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지, 미군 당국은 틸만에 대한 애국적 추모의 열기가 좀 가라앉은 4주 뒤에 사실을 '-인 것 같다' 는 표현을 써서 공표했다. 그리고 이제 일년이 지난 뒤, 그간의 사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던가를 밝히는 새 보고서가 나온 것이다. 새 보고서를 만든 것은 틸만의 가족이 그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며 사실을 밝혀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보고서를 작성한 군 조사관은, 틸만에게 수여된 훈장은 그가 영웅적 전투 행위를 수행했다는 잘못된 보고에 근거해 수여된 것이므로 취소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동시에, '사실을 숨기려는 어떠한 공식적인 움직임도 없었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저렇게 조사해놓고 마지막에 웬 헛소리인지 모르겠다. 은폐 노력이 '공식적' 인 것이 아니라 지휘관들 개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는 말인가.

적군에 의해 죽었든 아군에 의해 죽었든, 틸만의 죽음은 장래가 촉망되는 한 젊은이의 아까운 희생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틸만처럼 거액의 몸값이 붙은 젊은이만 아까운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나 학업을 위해 군에 입대한 수많은 가난한 젊은이들의 희생 역시 아까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장래가 촉망되든 촉망되지 않든 인간의 목숨은 고귀한 것이 아닌가. 젊은이들의 고귀한 피를 요구하는 전쟁과 그 전쟁을 이끄는 탐욕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다.

틸만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죽음을 놓고 진실 위에다 애국주의의 껍데기를 뒤집어 씌우려는 노력이 볼만하다. 어디 처음 일인가. 총 한 방 안쏘고 이라크군에 잡힌 뒤 부상까지 치료받는 대접을 받다가, 사실과는 달리 언론과 군 당국에 의해 전쟁 영웅으로 둔갑된 뒤, 스타가 되어 '자서전' 까지 내며 천문학적 금액을 벌어들인 제시카 린치도 있지 않았나.

사실이야 어쨌든 뭐 어떠랴. 전쟁의 광기는 적어도 일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게 마련이고, 약빨은 언제나 듣게 마련인 것이다.

사진: AP

덧글

  • 로젠탈 2005/05/06 14:18 # 답글

    참담하군요.
  • 원씨 2005/05/06 16:01 # 삭제 답글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대충 알고는 있었는데 자세히 알게 됐군요...씁쓸;;;
  • 메르키제데크 2005/05/06 18:15 # 답글

    전쟁이라는 속성으로 보자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미국으로서는 이겨야 하니까요. 그런 걸 좋아해주기도 싫고. 추하게 보는 것도 지치니.. 다만 미국은 너무 국가와 언론이 궁합이 잘 맞습니다. 그게 참 기분나쁜거죠.
  • Skep 2005/05/07 00:35 # 답글

    참으로 어이없는 에피소드군요....
    국익을 위해서 자신의 죽음이 왜곡되는것을 무덤에서 그가 알게된다면 당황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우직한 사람(?)이라지만.
  • deulpul 2005/05/07 01:03 # 답글

    로젠탈, 원선생님: 네... 알고나면 기분이 찝찝해지는 종류의 뉴스죠. 참담하고 씁쓸하게 해드려 죄송~...

    메르키제데크: 죽고 죽이는 전쟁 상황인지라 별별 오만 공작과 조작이 다 가능하겠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전쟁이란 아예 싹수부터 문질러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상황이든 사실과 진실은 여전히 중요한 것이겠죠. 미국 정부와 언론의 찰떡궁합은 특히 국제 문제에 대해 두드러지는데, 이걸 보다보면 미국의 찰떡궁합이 비정상적인 게 아니라, 국제 문제든 뭐든 겉궁합 속궁합 하나도 맞지 않는 한국의 정부와 언론 관계가 더 희한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Skep: 죽은 사람은 언제나 말이 없고, 그 무덤 위에서 어떤 깃발을 올릴지를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살아있는 사람의 몫이죠. 이것저것 신경 안써도 되는 고인은 차라리 행복하다 하겠습니다...
  • kris 2005/05/12 09:15 # 답글

    이제서 포스트를 봤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라고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도 위로를...사랑하는 가족을 잃은슬픔이 아직 남아 있을텐데...참 허탈하기 그지 없을 것 같습니다.
  • A-Typical 2005/05/21 09:28 # 답글

    죽은 사람 입장에서는 적군과 싸우다 죽었건, 동료의 실수로 죽었건, 전쟁터에서 "죽은 것"은 마찮가지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진실이 제법 자주 밝혀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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